어떤 ‘패밀리 리유니온(family re-union)’
40줄을 넘어선 자식들 키울 적에 내가 그닥 고압적이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바로 그 자식들 입에서 말이다.
물론 다른 집 아버지처럼 살뜰히 많은 관심을 기울여 키우지는 않았다.
그냥 우리들이 그렇게 컸듯, 보통 집 수준으로 다른 집 아이들처럼 그렇게 커가기를 바랬다.
이런 과정에서 나의 경상도 출신이라는 지역성이 가미된 특유의 양육 개념이 가미된 것은 있었다.
말 많이 하질 말라는 것, 감정의 표시를 함부로 막 하지 말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경상도 아버지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무뚝뚝하고 근엄하면서 다소 원리원칙에 입각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나로서는 그래도 나로서 할 수 있을 만큼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꼈다.
물론 아내나 아이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저께 큰 아이 내외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이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한참 산에 빠져있던 1980년대 초반, 내가 거의 매일이다시피 새벽에 아이를 데리고 관악산을 올랐다는 것이다.
그때 아이가 너댓살이었을 것인데, 그 어린 것을 내가 새벽에 깨워 관악산을 올랐다고 아이가 말을 하는데,
나로서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을 뿐더러 아이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것도 처음이다.
내가 그럴 리가 있냐면서 아니라고 했더니, 아이는 정색을 하며 나의 기억력을 나무라는듯 했다.
곁에 아내도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었다. 아이가 이런 얘기를 꺼낸 건,
아이가 이즈음 등산에 빠져 매주 등산을 간다는 얘기를 하는 와중이었다.
아이는 그 어릴 적 나를 따라 새벽에 관악산을 올라 연주대에 올랐다는 걸 좀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듯 했고,
그로써 등산의 맛을 그때 알았다는듯한 표정이었다.
아이가 이 얘기를 꺼낸 것에서, 나는 아무래도 내가 그 당시 어린 자식들에게까지 얼마나 고압적이었는가를
아이가 간접적으로나마 넌지시 얘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라.
너댓살 어린 아이였으면 얼마나 아침 잠이 많을 나인가.
그런 아이를 나는 거의 강제적으로 깨워 높은 산으로 데리고 다녔으니.
하지만 아이의 그 얘기는, 또 어떤 한편으로 내가 그런대로 아이 어릴 적에 나름으로
꽤 깊은 생각으로 아이를 챙겼을 것이라는 하나의 반증이었고,
그것도 아이 지 입으로 하는 것이니 내 면이 그나마 좀 세워지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아이가 4살이었던 어느 날, 아내로부터 급하게 회사로 전화가 왔다.
아이가 다 죽게됐다는 것인데, 아파트 베란다 문을 박차고 나간 사고가 생겼던 것이다.
아이는 과천 동네병원에서는 고개를 흔들기에 사당동 큰 병원으로 이송이 됐고, 나는 정신없이 그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긴급 치료를 받고 피투성인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내는 혼비백산 그대로인채 계속 울고 있고...
내가 침대로 다가가 “봉은아!”하고 불렀다.
내 부름에 아이는 눈을 떴다. 그러더니 두 팔을 벌리며 나에게 안기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는 아이를 껴 안았다. 내 옷도 피 범벅이 됐다.
그 아이를 꼭 껴안고 나는 병원 복도까지 나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아이도 내 품에 안긴채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나는 그런 상황이었지만, 비로소 아이가 나를 아버지로서 찾으며 매달리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감격스러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얘기를 하자 분위기가 침묵 속에 다소 가라앉았다. 아내는 괜히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왜 하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며느리는 내 느낌으로 보기에 울먹거리는듯 했다. 나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다.
그로써 흡사 ‘패밀리 리유니온(family re-union)‘을 위한 이벤트 성 얘기를 내가 펼친듯 한 것이었으니…

#FamilyReun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