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t of A Woman’, 그리고 뉴욕의 추억
코로나로 인한 이른바 '집콕' 덕분(?)인가, 요새 하루에 영화 한편 씩이다.
주로 흘러간 영화를 보는데, 그제와 어제, ’도니 브레스코(Donnie Brasco)’와 ’체인절링(Changeling)’을 봤다.
오늘은 ’여인의향기(Scent of A Woman)’다.
탱고 춤추는 장면으로 유명한 알 파치노가 프랭크 역의 주연으로 나오는데,
‘도니 브레스코’에도 나오니 그 양반을 요즘 자주 만나는 셈이다.
지난 92년에 나온 이 영화는 언젠가 한번 본 적이 있다. 탱고 춤 추는 장면을 그래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그 장면도 그렇지만, 그리 멀지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와 잠시 추억에 젖었다.
찰리 역의 크리스 오도넬이 동행한 알 파치노의 '자살 여행' 행선지는 뉴욕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회상은 말하자면 뉴욕에 대한 추억이라 할 것이다.
자살하기로 마음먹은 알 파치노는 무엇이든 최고급이다.
몇 날 머무기로한 호텔도 뉴욕이라면 당연히 ’월도프 아스토리아’이다.
여러 장면에서 객실과 로비 등 그 호텔의 곳곳이 나온다.
나도 그 호텔에 한번 머물러 봤다. 95년 10월이었는데, 한 5일 쯤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호텔이 나오는 여러 장면을 좀 챙겨 보았다.
우선 고풍스런 객실의 모습이다. 육중한 방문도 그렇고 가구나 집기들도 대부분 빈티지풍의 것들이다.
오래되고 전통있는 호텔이라 방마다 유명인사들이 다녀갔다는 팻말도 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호텔에서 잊지 못할 사건의 추억이 하나 있다.
호텔방 문이 안에서 열게 돼있기 때문에 잠시 나오면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사태가 왕왕 생기는 줄 모른 탓에 생긴 사고다.
어떤 수행 비서관 한 분하고 그 분 방에서 술을 마셨다. 서울서 갖고 온 소주에다 깻잎 장아찌를안주로.
그 양반은 그 때 팬티 차림으로 있었다. 둘이서 많이 마셨다. 시간도 많이 됐고 취기도 올랐다.
내 방으로 가려는데, 바깥 복도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팬티 차림으로.
그러려니했다. 나는 내 방으로 왔다. 아마도 같은 층이었을 것이다.
한 밤중인데, 뭔가 바깥이 시끄럽다.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저벅거리고 어수선하다.
나가 봤다. 복도에서 미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뭔가를 드느니 마느니 하면서 낑낑댄다.
사람이다. 사람이 복도에 드러누워 있었다. 털이 많은 시커먼 사람이 팬티 차림으로.
그 양반이었다. 그 분을 수습하려는 사람들은 한. 미 양측의 경호원들이었고.
나를 배웅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안 열린다.
술도 취했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 양반은 그냥 복도에 벌렁 나자빠진 채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코고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소음으로 경호원들이 뛰쳐 나왔다가 복도에 뻗어있는 그 양반을 보고
'한.미 합동'으로 그 소동을 벌인 것이다. 그 소동으로 좀 시끄러웠다. 하지만 '오프 더 레코드'로 처리됐다.
박 씨 성을 가진 그 분은 이 세상에 없다. 몇년 전, 고향 인근의 산을 일행들과 올랐다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호텔하면 떠오르는 일본 엔카가수도 있다. 이시가와 사유리.
가을비가 주룩 주룩 오는 일요일. 휴일이라 호텔 방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NHK 위성방송이 나온다.
우리로 치면 아마도 ’가요무대’ 같은 프로에 이시가와 사유리가 나왔다.
얼굴에 점이 있는 아줌마 가수다. 나는 엔카를 잘 모른다.
그런데 그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귀에 무척 익었다. "아카시아노…"로 시작되는 노래.
어릴 때 ’아카시아에 보슬비 내리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문주란인가 누군가가 불렀던 노래다.
우리 가요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래는 엔카였다.
그래도 어찌나 반갑고 귀에 절절하게 들려 오든지 그 노래도 그랬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이시가와 사유리를좋아하게됐다.
영화에서 알 파치노가 자살을 결심한 후 크리스 오도넬을 떨어뜨려 놓고자 담배심부름을 시킨다.
50번가와 5번가 사이에 있는 ’던힐 스토어’에 가서 cigar를 사오라고 한다.
그 가계도 몇 번 들러 필요한 것들을 사 본 기억이 있는 곳이다.
프랭크와 찰리가 뉴욕에 도착해 처음 들린, 햄버거 하나 값이 24달러로 나오는
‘오크룸’도 뉴욕에 있는 돈 많은 지인과 한번 가본 곳이다.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에도 몰두했지만, 어떤 장면들에서는 자꾸 추억 쪽으로만 연결되고 엮어진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 영화에서는 또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알 파치노가 뜬금없이 한국 말을 한다.
군 생활 얘기를 하면서 뭔가 불만 속에 덧붙이면서 하는 말인데, 그것은 ’판문점’이라는 말이었다.
알 파치노의 한국어 발음은 비교적 정확하고 또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