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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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필동 선배님

by stingo 2024. 1. 19.



"술 드셨어요, 회장님?"
필동 선배님과 점심 먹으려 동네 식당에 들어섰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선배를 보며 한 말이다.
술은 무슨 술. 내가 곁에서 한마디 하고 언뜻 선배님 얼굴을 봤더니, 어라, 얼굴이 술먹은 사람처럼 정말 벌겋다.
주인 아주머니 그 말에 "허, 허"하며 자리에 앉으시는 선배님의 얼굴이 더 벌개지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선배님 사무실로 들어오는 건물 앞에서 지나가는 어떤 한 사람이 선배를 보고 인사를 하며 또 그랬다. “술 한잔 하셨습니다.”
선배님의 지인이었다.

선배님이 나와 만나면서 나에게 당부한 게 하나 있다. 술은 이제 마시지 말라는 것, 그러니 둘이서도 마시지 말자고 했다.
선배가 심장스텐트 시술한 몸으로 근자에 술을 많이 마셔 허둥되는 나를 보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선배더러 술 마신 것 같다니, 왜 그럴까. 밥을 먹으며 가만 생각을 해봤다. 뭔가 딱 걸리는 게 있었다.
적잖은 나이에 말을 많이 하면서 과장을 좀 보태 영육적으로 소진을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
그 거 아니고 선배가 어디 아프지 않는 한 그런 얼굴이 될 수가 없었다.

이즈음 거의 매일 선배님의 필동사무실에 들러 얘기를 듣는다. 들려주시는 얘기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다듬어지지 않은 어눌한 말투이지만 재미도 있고,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지금껏 팔십여 년을 살아오신 인생 역정이 하나의 드라마다. 그런 얘기들을 하며 선배는 때때로 격정에 젖기도 한다.
그런 때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표정도 상기되기 일쑤다. 그러다가 기억하기 싫은 어두운 부분에서는
침잠하는 듯한 말뽄새가 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기도 한다.
선배의 그런 얘기를 나는 그저 듣기 만 하는 게 아니고 질문도 하고 맞장구도 친다.
그 건 일종의 추임새일 수도 있을 것인데,
나의 추임새성 맞장구에 선배의 얘기와 표정은 더욱 격정적이 된다.

두어 시간 얘기를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온다. 바깥으로 나왔지만 선배는 감정의 스위칭이 쉽지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그게 결국은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벌개지면서 마치 술을 마신 것 같은...
80줄 나이의 선배에게 그런 일은 영육을 탈탈 털어 소진시키는 일종의 강도높은 노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까.


8일 처음 뵈었을 때 간단하게 한 잔했다. 그 이후 함께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정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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