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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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

이사도라(I)

by stingo 2020. 6. 5.

서부전선 그곳 OP내가 속한 중대본부벙커 곁에 그들의 막사를 겸한 벙커가 있었다그들은 북쪽을 향해 방송을 하는 이른바 대북방송요원들로특전사 소속이었다시멘트로 지은 벙커는 오래 됐기도 했지만방음장치가  좋지 않아 쪽에서 주고받는  잡담이라든가 방송 내용 등이 우리 방으로  들려왔다 중에서도 가장  들리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였다우리  방송  필요한 것은 매시간 대형 스피커를 통해 북쪽으로 쏘곤 하였는데그런 방송이 아니더라도 취침시간을  놓고는 라디오를 항상 틀어놓고 있었다


우리들은 언제 어떤 방송이 나오고 어떤 방송을 쏘는지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는데 중에 예컨대 매일 정오 무렵이면 나오는 방송이 있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 구슬픈 리듬이 전주로 나오면서 구수한 입담으로 북한을 얘기하는반공 캠페인의 방송이었는데  나올 무렵이면 우리들은 점심밥을 챙길 준비를 하는말하자면 식사 시그널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쪽 벙커에 처음  것은 자의라기보다 그들의 호출에 의한 것이었다특전사 공수부대는  명성 하나만으로도 강한 것이라같은 한국군이라도 그들이 상대적으로 셌고우리들은 그들에게 고분고분해야 했다그들이 나를 부른 것은 우리벙커에서 때때로 하는 등을 조달하는 일에 편승해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은  우리 중대본부의 신참병이 해야 했고나는    위치에 있었다.

 
어느  저녁 무렵내가 호출을 받고  벙커에 들어가려고 육중한 문을 열었을  눈에 익숙하지 않은 뿌연 백열등 안의 벙커를 조용하게 울리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귀에  익숙했던 어떤 노래였다어니언스의 '편지,'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입대할 무렵  노래를 들어보고 처음 대하는 노래라순간 잠시  먹먹해졌다 모습이  이상했던 모양이다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너  노래 알아?"
     
벙커 안이 눈에  들어오면서 방송장비들 앞에 앉아있는 몇몇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는데그중 어떤 이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묻는 것이다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어정쩡해 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내가 그 노래를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그에 따른 주문이 있게 마련일 것이다.
     
" 노래 들으니 떠나 온 사회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그래?"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 그가 뭔가를 집어들며 말을 잇는다 말은 물음이라기보다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에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딱히 말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은 어설픈 웃음이었을 것이다그는 병장이었다이른바 공수부대원이 아니더라도 병장 앞에서 그렇게는   없던 시절의 군대였다그는 곱상스레한 얼굴이었고  길러진 곱슬머리였다나를 쳐다보더니 그도 씨익 웃었다짤막한 순간이었지만내가    짓을 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상황을 모면하자면 비굴해지는 수밖에 없다노래를 안다고 했고노래가 좋다고 했다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근성으로  말을 들어주었다.


 사람그러니까  병장은 수통을  손에 들고 있었다소주를 담을 수통이다수통  개에 소주를 사서 담아오라는 부탁이다우리  것하고 해서  통이다수통하나에  홉들이 소주  병이 들어간다탄띠에 수통  개를 달고 OP 내려가 '자유의 다리' 북쪽 게이트 미군 PX 가서 소주를 사오는 것이다위험한 짓이다. OP에서 내려가 PX 도달하려면 개성 가는 1 국도를 건너야 한다이지점에서 도로를 가로지르다 사고를 당하는 수가 있다경계병에 총을 맞을  있는 것이다  저녁의  일은 나로서는  번째다하지만 나는 그날 저녁 무사히 일을 마쳤다. PX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홉들이 소주  병까지를 병째로 마시고 돌아왔다.


 병장 위로 중사 하나가 있었는데 사람이  벙커에서는 제일 높았다그날 저녁 소주를 전해주러 갔다가 소주를  얻어 마셨다우리 벙커 고참 눈치도 있고 해서 한사코 사양했지만중사가 몸소 우리 고참에게 전화까지 해서 나를 잡아두고는 소주를 안겼다 자리에서  병장은 중사와 함께 나를 처음 보는데도 동생 대하듯   주었다같은 부대원도 아니고 무슨 화제가 있겠는가 병장은 음악그러니까  당시 유행하던 통기타 풍의 노래를  알고 있었고 관심이 있는  같았다. 내 반응이 그들의 환심을 사기에 그럴듯 했던 모양이다. 나 또한 학교시절에 기타 께나 잡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몇몇 노래를 흥얼거릴 줄 정도는 됐기 때문이라 그랬을 것이다. 주고받는 얘기가 결국 주로 노래 쪽으로 흘러가면서 우리들은 초면임에도 친해져가고 있었다.

 
그런 얘기들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는 중에도 라디오에서는 뉴스도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그곳에서 술을 마시면서 비로소  벙커 안을   자세히 들여다   있었는데내무반을 겸한  방의 대부분은 육중한 방송장비로 채워져 있었다라디오는 우리 방송은 물론이고 공산권의 단파방송까지  잡혀지는 고성능이었고 음질도 좋았다서로들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라디오에서 갑자기 기적이 울려 나왔다그리곤 이어지는 감미로운 음악 모리아가 맨발의 댄서였던 이사도라 던컨을 생각하면서 만들고 연주한 '이사도라(Isadora)' 였다.  시간은  10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 방송의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방송은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 벙커 사람들 중에 이 병장이 제일 즐겨듣는 밤 방송이었다.


 병장과는    알게 됐고 친해졌다서울의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고재학 중에는 그룹사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전방부대 OP에서의 일은 단순하다각자들 맡은 일을  시간에 하고 나면 예상 외로 시간이 많다졸병이 시간 많다는  좋은 것은 아니다시간  많다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시간에  위치에서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병장은 그런 나를  돌봐주었다우리 고참들에게 얘기해 무슨 시킬 일이 있는  자주  내 데려갔  벙커에 가보면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그냥  처지를  주느라   것이다일과 시간에는 장비이동 등을 구실로 불러내 OP 관측장교 실에서 편히 쉬도록 했고일과 후에는 자기 벙커에서 술을 마시게 했다 늦게까지  벙커에서 마실 때엔 언제나 이사도라가 전주로 나오는  방송이 흘러나오곤 했다.


 방송은 시그널 음악인 이사도라가 주는 애잔함과 감미로운 여운만큼 한밤에 어울리는 포근한 내용으로 좋았고진행하던 여자 성우는 듣는 남자 누구든동경의 대상이  정도로 포근한 말에 그 내용 또한 좋았다.  라디오가 대세인 그 시절 당대의 인기를  몸에 안고있던 인기 성우였다방송은 매일 어떤 주제  가지를 정해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그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는 포맷으로 엮어지는무거운 주제는 아니었지만 얘기들이 밤의 분위기에 맞게 오밀조밀해 오늘은 어떤 주제일까로 궁금해 하던 청취자들도 많았다그러다 이상한 일을 겪었다비극적인 결말을 알아가는 단초였다고나 할까.


  8 장마 무렵이었을 것이다일과  점호가 끝나고  벙커로 불려갔다오랜 만이다 병장이  날간의 출장을 마치고 귀대한 날인데아마도 토요일이었던  같다 벙커엔 모두들 외박 나가고  병장 혼자 있었다 병장은 서울서 사온 통조림과 과자그리고 소주를 신문지 위에 대강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취해 있었다아마도 귀대하러 강을 건너기  문산에서   하고  모양이었다.

 
술을   주고받았다그는 말이 없었다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그날따라 유독    닿은 것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라디오에서는 남녀가 재잘거리는 만담 류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여자 만담가의 웃음이 귀에  거슬린다는 생각에 그렇지 않느냐는 투로  병장을 바라다보았다취해서였을까 병장은 눈을 감고 있었다. " 병장님" 하고 나지막이 불렀다눈을 떴다그런데 예사로운 눈이 아니었다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이었다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같은   방송이 이사도라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병장은 눈을 뜨고 말문을 열었다그리고는 뭔가를 중얼거린다. 희미하게나마 그 말이 들렸다. "게츠비, 위대한 개츠비."(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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