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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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II)

by stingo 2020. 6. 8.

갑자기 개츠비라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하지만  의문은 금방 풀렸다그날   방송의 주제가 바로 개츠비였다 병장은 어떻게   맞췄을까 여자 성우는 촉촉한 목소리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데이지를 얘기하고 개츠비의 사랑을 얘기해나가기 시작했다 병장이 갑자기 무슨 말을 중얼거린다가만 들어보니 영어다. "My life has got to be like this, is got to keep going up." 후에 알았지만  소설에 나오는 대사문장의 하나다. "내 인생은 이렇게 되어야 해. 계속 그렇게 될 거야." 놀라운 것은  여자 성우가 흡사 따라 하듯 방송에서  문장을 영어로 말하고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었다정말 신통하지 않은가


 병장은 방송을 라디오에 빠져들  조용히 듣고 있었다 병장은 그리고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울음 속에 어렴풋이 '누나'라는 말이 섞여있는  같았다하지만 무슨 말인지 명확하지는 않게 들렸다하여튼  병장의 그날  그런 모습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지만 술이 취해 감정이 동했고 어쩌다 용케 방송의 주제를 맞춘 것이려니 했다 것도  때문 이었을 것이고하지만  병장의  방송을 둘러싼 이상한 짓거리는  후로도 계속됐다 번에 그치지 않고  후로도 여러 차례 방송내용을 미리 알고 얘기해 주는 것이었는데대개가 신통하게 들어맞았다뭔가 어떤  방송과 어떤 사단이 있는  했다.


 병장은 서울을 자주 나갔다입대한  그때까지 서울을  번도 나가보지 못한 나의 처지에서는 부러운 일이었지만그래도 그를 통해 서울의 친구들에게 전갈을 넣을  있었고 또한 여러 소식을 들을  있음은  나름으로 하나의 활력소 같은 것이기도 했다.


서울 갔다 오는 날마다  병장은 달랐다어떤 때는 기분이 좋아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어떤 때는 우울해 하는 날도 있었다그러다 술이 취하면 간혹 눈물을 지으며 울기도 했다 이유를 알기 전엔 흡사 무슨 조울증을 앓는 환자로 여겨질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남달랐다매일 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병장과는 부대가 다르고 계급 차이는 있었지만허물없는 사이로  갔다그러는 사이사이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는데 과정에서 그와 그의 집이 라디오와는 땔래야   없는 처지였고 밤에 나오는  방송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병장의 아버지는 당대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에 있어 대부 같은 존재였다어떤 방송 누구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정도로 방송계에서는 알아주는 분이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같은 라디오 방송으로 인연을 맺은 분이었다 병장 자신도 대학에서 전공이 라디오  미디어와 관련이 있는 학과였다때문에 그가 제대를 하고 졸업을 하면 십중팔구는 방송에 몸담을 것이 점쳐지는 처지였다.

 
아버지가 그런 위치에 있는 관계로  병장은 방송계 사람들을 어릴 적부터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디오 방송 대부의  아들이니 오죽 했겠는가어릴 적부터 집을 드나들던 방송계 사람들은 그를 마스코트로 여기고 귀여워했 병장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것 같다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한 엄한 성품이었다아버지는  병장을 엄하게 키우려 했을 것이고 병장은 그런 권위적인 아버지가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어쩌다 아버지에 관해 얘기를 하는데, 우습게도 대부분이 아버지 골탕 먹인 얘기다이를테면용돈이 궁해질  아버지를 이용해 돈을 마련하는 여러 방법을 얘기하곤 했다그중  가지는 비싼 책을 아버지 명의의 월부로 구입해 그것을 청계천에 내다파는 방법이다어느 날인가서울 갔다 오면서 먹을 것을 잔뜩  갖고 왔는데그게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라고 했다외국 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   값이 30 몇 만원이었던 시절이었다.


한밤중에  병장이 OP  황량한 벙커에서 매일 라디오를 끼고 살면서 듣던 이사도라가 흘러나오는  방송과의 관계는  아버지의 위치로 보아 대략 짐작은 했지만 병장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도 충분했다 방송을 진행하던 여자 성우는 어릴 적부터  병장의 집을 드나들던 아버지의 제자 격인 사람이었다나이 차이가   어살 남짓했던 병장이 누나라고 부르던 사이였다 누나도 물론  병장을 귀여워해주고 좋아했을 것이다그런 마음들이 오고가면서  병장은 자라고  것이다.


 병장은 서울 나갈 때면  누나도 만났을 것이다여의치 못하면  만날 수도 있었다 누나를 만나는 날은 기분이 좋아졌고만나지 못하면 기분이 우울해졌다누나는  병장에게 동생에게 얘기하듯 자신이 맡고 있는 인기 최고의 방송을 자랑했을 것이다그러면서 어쩌다 방송할 내용을 말해줬을 것이고 병장은 OP 벙커에서 매일   방송을 들을 때면  누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비극이었던 것일까. 그 게 비극이라면그것은 어떤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장마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병장이 귀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우리 부대 일이 아니어서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었지만중사는 내게  사고를 알려주면서 뭔가  알고 있는  없냐고 물었다대충 어떤 사단에 의한 것이라는 짐작은 있었지만그렇다고 내가 그것을 말할 게재는 아니어서 모른다고 했다 병장은  다음  아침 자유의 다리 남단 부근에 쓰러져있던 채로 미군에 의해 발견돼 좀 시끄러웠다발견될 당시까지 그의 몸에서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일로 OP가 좀 시끄러웠다.  일이 있은  우리 중대에서는 나더러 주의를 주었다 병장과 자주 만나지 말고 술도 같이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한 얘기가 OP 떠돈 것도  무렵이다아무래도  병장이 이상하다는 것이다탈영을 시도했다는 얘기도 들렸다어떤  밤에는 라디오를 외장스피커를 통해  놓아  밤의  방송 시그널 이사도라가 OP 전체에 울려 퍼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병장은 벙커 안에 머문  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아무래도  되겠다 싶었다벙커로 찾아갔더니  병장은 빤히 쳐다    누워 있었다중사가 그냥 가라고 했다뭔가 이 병장에 대한 조치가 임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식을 하고 있는 화기소대에서 OP 올라오는 산길에 쉬어가기 좋은 목이 있었다. OP 배식병이 밥과 국을 각각 바케츠에 넣어 물지게처럼 지고 올라오다가 쉬어가는 곳이다장마비가 잠시 멎은  내가 배식병으로 물지게를 지고 OP 올라오는데 그곳에  병장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했다반갑기도 했지만걱정이 앞서기도  땀을 훔치며 잠시 머뭇거리는데나의 손을 잡는다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겁다
     
"나는 GOP 부적격자라 이곳을 떠난다제대하고 서울에서 보자." 
"언제 떠납니까?" 
" 떠날 것이다." 
" 동안 덕분에  지냈습니다어디 가시든지  지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내가 떠나더라도 계속 들어 누나가     거야. '위대한 개츠비',  언제 한번 다시 들려줄 거야데이지보다 그 때는 젤다를 얘기해주면 좋을 텐데..." 
     
이 양반이 오랜만에 만나 왜 이런 말을 내게 하나 싶었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좋아했으나다른 사람과 결혼한 개츠비의  사랑이고젤다는 작가인 피츠제럴드와 결혼한  정신병원에서 불에  죽는 비련의 여인인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병장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장마 비가 며칠 이어졌다하늘이 뚫린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새벽 무렵이었다비가  잦아들고 있었고귀에 지겹도록  박힌 둔탁한 빗소리도 조금 명료하게 들리고 있었다. "!" 무슨 소리가 들렸다분명 OP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빗소리와 더위로 뒤척인 잠자리라  분명하게 들었다  지났을  들려왔다. "!" 이번엔  소리에 금속성이 묻어났다불침번이 밖으로 뛰어나가고 소리를 들은 중대원  명이 뭔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불침번이 뛰어 들어왔다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사고그러면 공수부대원 벙커일 것이다그런 확신이  순간  것과 함께  병장의 얼굴이 언뜻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밖으로 뛰쳐나가니 공수부대 벙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벙커 안에서 비명에 가까운 무슨 소리가 들렸다. "!"

 
 병장은 담요로  권총으로 관자놀이에  발을 쐈다유서는 나오지 않았다 병장은 죽기  날에도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후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그날  병장은  방송을 들으면서 라디오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중사가 달래고 말렸다그랬더니 아무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그리고 죽은 것이다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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