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재경 마산중학교 16회 동기친구들과 서울 도심 가을나들이를 했다. 가회동 등 서울 북촌과 청와대. 경복굼 등을 걸었다. 가회동은 나에게 추억이 어린 곳이다. 1977년 첫 직장을 잡아 하숙을 한 곳이기도 하고, 내 생애 처음으로 자취를 한 곳 또한 가회동이다. 가회동 언덕길 한옥마을을 걸으며 자취생활을 기억을 되살려 그 집을 찾아보려 했다. 아래 사진의 가회동 한옥들 가운데 한 집일 것인데, 하도 많이 변해버려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 어제 중학교친구들과 모처럼 걸어본 가회동 언덕길의 한옥들에 젊었을 적 어두운 한 기억이 녹아있어, 그 집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동네에서 하숙을 하다 결혼을 앞두고 잠시 자취생활을 한 때가 1978년 무렵이다. 그 때 80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살았다. 아무리 옛날이더라도 80만원으로 전세방을 얻기란 어려웠다. 사연이 있다. 무작정 복덕방엘 갔다. 80만원은 씨도 안 먹힐 돈이었다. 그래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들렀던 곳이고 거기서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다 당연히 퇴짜를 맞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하숙집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총각!”하고 나를 뒤에서 불렀다. 그 아주머니는 우연히 그 복덕방에 있었고, 거기서 내 이야기를 듣고있었던 모양이다. 방을 구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고, 80만원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우리 집엘 가자며 아주머니 나를 이끌었다. 솟을 대문의 큰 한옥이었다. 이런 곳에 80만원? 나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정원이 넓은 집에 들어서서는 나를 보고 방들이 많으니 맘에 드는 곳을 고르라고 했다. 나는 다시 80만원을 얘기했다. 아주머니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방이든 고르라고 했다. 마당 쪽 한 켠에 남방인 별채같은 작은 마루가 달린 방이 보였다. 방은 작았지만, 혼자 있기에는 충분했다. 아주머니는 그 방으로 하라고 했다. 다시 80만원을 얘기했더니, 돈은 신경쓰질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저것 묻고 따질 것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그 집엘 들어갔다. 얼마 후 아주머니로부터 듣기로 복덕방에서 나를 본 아주머니는 내가 맘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 들어가 살게됐다. 그 아주머니는 점쳐주는 일을 하고있는 듯 했다.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들은 나와 같은 하숙집에 있던 내 중학교 한 해 후배와 부산 K고등학교 동기로, 그 당시 은행에 다니고 있었고, 딸도 역시 은행원이었다. 어느 날 좀 늦은 밤에 아주머니가 딸을 내 방 앞에 데려와서 인사를 시켰고,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아주 잘 대해줬고 그 집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살게했다. 그러던 어느 초 겨울날, 토요일 야근을 하고 일요일 늦게까지 잔 내가 눈을 떴을 때 방문 앞에 그림자로 뭔가 날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햇볕 잘 드는 방문 앞에 빨래줄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하지도 않은 빨래들이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눈에 거슬려 방문을 열고 널린 빨래들을 봤더니, 여자 속옷들이었다. 이 무슨 해괴망칙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것들을 걷어 마루 한 켠에 그냥 아무렇게나 널려놓았다. 그 빨래들은 그 집 딸 것이었다. 딸이나 아니면 아주머니 둘 중 누군가 그 빨래들을 내 방문 앞에 널어두었을 것인데, 이 무슨 짓인가 하는 불쾌감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이해가 안 되는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내 방 냉장고에 먹을 걸 누가 잔뜩 채워놓는다든가, 마루에 빨래로 내놓은 양말이나 옷가지 등 세탁해준다든가 하는 일 등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맘 먹고 아주머니에게 그러시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나는 짜증과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표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심기가 확 변해버린 건 내가 지금의 아내와 만나면서 내 방으로 아내를 데려오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확 달라지면서 나와 말다툼이 이어졌고, 급기야 어느 날은 대판 말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내는 그 집 아주머니와 그 딸의 나에 대한 이런 저런 태도 등을 보고는 그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오기로 하고 통보를 했다. 1979년 초인가 그 집을 나오면서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전세금 80만원을 그대로 돌려주질 않으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명분을 붙여 반 정도만 주겠다고 했다. 용달차를 집에 세워놓고 나오면서 돈을 얼마나 받고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후에 그 집을 다시 한번 간 기억으로 보아 돈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이 되지않았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그 집을 다시 갔을 때 이런 일도 있다. 대문이 열려있길래 그냥 들어가 본채 안방 앞에서 아주머니를 부르려했다. 그 때 나는 뭔가 못볼 것을 봤다. 안방 문이 반쯤 열려있었는데, 그 방에 아주머니가 누워있고, 어떤 남자가 아주머니 곁에 앉아있는 것인데, 그 형상이 해괴했다. 아주머니는 배를 드러낸 채였고, 그 남자가 아주머니 배를 주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보고 밖으로 나가 다시 아주머니를 크게 부르면서 집으로 들어갔고, 그 때 그 남자가 황급하게 안방을 나오는 것 봤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후배 얘기로는 아들이 아닐까 했다. 후배, 그리고 문간방에 세들어 살던, 당시 덕성여고 국어선생 하시던 분 얘기로 아주머니의 아들과 딸은 둘 다 양자와 양녀라고 했다.


#가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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