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물씬 짙어져 간다.
이른 가을 아침, 벌판에 서서 불어오는 아침 산들바람 속에 몸을 맡겨본다.
몸과 마음이 가을바람에 젖어가면서 나는 가을의 한 가운데 홀로 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을 시 한 편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운길산 기슭에 누른 잎 흩날리고(雲吉山前黃葉飛)
소양강 북쪽에 철 이른 기러기 돌아오네(昭陽江北早鴻歸)...'
가을의 흥취를 담은 '秋興'이란 시의 한 구절인데,
읽으면 읽을 수록 시의 분위기가 사뭇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가을의 흥취하고는 딴 판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울적함이 묻어나는 시다. 나만 그런가.
선생은 깊어가는 가을 속에 뭔가를 결정치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운길산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있다. 그게 하필 가을 날이다.
"가을의 흥취는 곧 울적함일 수도 있어"라고 선생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끝 구절은 그래서 이렇게 맺고 있다.
'세속에서 물러남이 진실로 좋으나(世間休退誠能事)
절반은 남에 의해, 절반은 내가 어겼네(半被人牽半自遠).'
쾌적하면서도 한편으로 스산함을 한 모퉁이에 안겨주는 가을 날이다.
그래서일까, 선생의 이 시를 읽으니 좀 울적해 지기도 한다.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참으로 짧은 것이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기도 하면서 그러하다.
조만간 가을 운길산을 찾아 다산의 체취를 더듬어 봐야겠다.
(가을 운길산의 억새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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