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일 마치고 오면서 사온 쌀을 현관까지는 캐리어로 날랐다. 아파트 현관에서 부엌까지 옮겨야 하는데, 당연히 내 몫이라 생각하고 주섬거리니 아내가 아서라 한다. 안 좋은 허리, 또 '항칠'하면 어쩔려고 그러냐 한다. 그러면서 쌀 포대를 든다. 거뜬히. '항칠'은 경상도 사투리로, 흠이나 스크래치로 이해하면 된다. 서울사람인 아내가 이제는 경상도 사투리까지 척척한다.
그 전날, 제주 감귤 택배 상자 옮기는 것도 아내 몫이었다. 천하장사 이만기 같다. 내가 "이만기가 따로 없다" 했더니 마누라는 씩 웃는데, 그 표정이 정말 이만기 같으다.
집 안팍으로 아내 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내 할 몫은 줄어든다. 힘에도 부치고 하기도 싫고. 이러다 정말 뒷방 노인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도 아내가 애써 까 녹즙기로 간 감자즙을 마시면서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자, 그것도 쪼그맣고 오래 된 것 껍질을 까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내 먹을 것이니 내가 맡아 했는데, 허리 병을 핑계로 마누라에게 맡긴 일이다. 그 일이 아내도 귀찮은 모양이다. 결국 한마디 한다. "오만가지를 내가 하는구나..."
확실히 아내는 나보다 많은 일을 한다. 매일 나가서 하는 자기 일도 그리 녹록치 않은데, 자식들 챙겨야지 그리고 또 나도 챙겨야지. 하지만 매사에 열심이다. 나는 건강의 측면에서 아내 하는 일을 '관찰'한다. 말하자면 마누라는 일단 건강하기에 각가지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관찰'하지 않을 수 없다. 안 그래도 지난 3월 한 차례 적신호가 와 9월 재검을 앞두고 있는 터라 더 그렇다.
어쨌든 나는 이런 상황이 아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싫지는 않다. 건강의 관점에서 마누라가 그런 것보다 내가 좀 부실한 게 오히려 났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내에게 있어서는 나라는 존재는 확실히 이기로 뭉쳐진 소산이 아닌가 싶다.
그저께 나는 56일 간에 걸친 묵주의 9일기도를 마쳤다. 내 스스로 대견하고 우쭐한 마음에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럼 나도 묵주기도를 해야지."
이런 아내를 내가 어찌 '천하장사'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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