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석 국정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어떤 상태로 마무리되었고,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보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청문회의 한 장면이 나왔다. 한 야당의원이 이 후보자의 친북성향을 묻고 있었고, 이 후보자는 특유의 능글능글한 묘한 웃음으로 야당의원을 가지고 놀듯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이 청문회를 볼 생각이 달아났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국힘당 의원들을 갖고 노는듯한 이종석 후보자가 정말 능수능란한 좌파로, 저런 작자가 국정원장이 됐을 때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를 상상해 보며,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내가 듣고 좀 놀랐던 것이 있다. 이종석이 그의 사상적 대부인 김남식(1925-2005)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이종석은 능수능란한 골수 좌파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했다.
남파간첩 출신으로, 1970년대에 검거돼 ‘전향’을 한 후 김남식은 중앙정보부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대북심리전 일에 종사했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해박했고, 특히 북한의 내부사정에 정통했다. 나는 그가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발간되던 <자유평론> 주간으로 있던 1970년대 후반부터 김남식을 지근거리에서 보아 왔었기에 그를 잘 안다. 당시 그는 전향자다운 언행으로 일관했다. 말이 없었고 항상 생각에 잠겨있는듯 했다.
그런 김남식의 숨통을 틔우게 한 것은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김남식의 행동 반경은 커졌다. 북한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북한을 거드는 말문이 대담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 좌파이념에 매몰돼 있는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종석이 김남식을 사사한 것은 이 무렵이다. 성균관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하면서 이종석은 김남식을 따랐다. 그 당시 성균관대 뿐만 아니라 북한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의 연구원들도 다수 그랬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종석은 어떤 의미로 보면 전향을 했다지만, 여전히 공산주의 이론가로 회자되는 김남식의 수제자로 보면 된다. 이종석 자신도 과거 좌파정권 시절에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게 여러 정황상으로 그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 그가 이재명 정권 국정원장 후보가 되면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친북. 친중정권으로 지목당하면서 어쩌면 당연한 수준으로 짐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종석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김남식과의 관계를 파고드는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따져 묻고 들어갔더라면, 이종석도 자신의 친북성향을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남식을 떠올리면서 부연적으로 ‘전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전향(轉向)’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어떤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인 방향 전환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 성향을 바꾸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 전향이라는 용어는 특히 생각이나 관념을 바꾼다는 ‘사상 전향’에 많이 쓰여진다. 기존의 사상이나 이념을 버리고 그에 반대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으로 바꾸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히 생각이 바뀌는 것을 넘어, 과거 자신의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부정하고 새로운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양심의 영역까지를 포함하느냐의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전향‘은 역사적 맥락에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짙은 질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6.25를 전후해 일어났던 ’보도연맹‘ 사건은 궁극적으로 끌고 당기는 집단적 사상전향의 와중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상전향‘이라는 것이 과연 완전히 생각과 사상을 바꾸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 또한 적지 않다. 김남식이 말년에 그랬듯 ‘전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예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사상 전향을 한 몇몇 분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초짜 기자시절을 북한관련 보도 일을 하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위 김남식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김남식 외에도 ‘북한연구소’ 이사장을 오래 한 김창순 선생, 그리고 안윤봉이라는, 마산 지역에서 잘 알려진 분도 잘 알고 있다. 그밖에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전향자들에 관해서도 전해지는 얘기로 알고 있다.

(어떤 ‘전향’)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봄의 끝물이면 떠올려지는 '落花'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쓴 이는 故 이형기 시인이다.
그는 해방 공간의 시기 진주농림학교를 다녔다. 좌.우 이념대결의 소용돌이는, 이 학교라고 가만 놓아 둘리가 없었다. 이형기는 좌익 쪽이었다. 학교 개교기념일에 올려 질 연극을, 지도교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학생 측에 권유했다. 좌익 쪽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다. 부르주아적 퇴폐주의의 산물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서야 되겠는가. 이 반발의 중심에 이형기가 있었다.
지도교사는 그에게 와일드를 다시 읽어볼 것을 권했고, 결국 '살로메'가 무대에 올려졌다. 이 지도교사가 바로 소설가 故 이병주 였다. 이 얘기를 들어 좌익사상에 물들어가던 이형기가 이병주의 권유대로 와일드를 읽은 후 그에 빠져 '전향'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알 수가 없다.
이형기의 그 후 시인과 기자. 교수로서의 생활은 이념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형기는 그의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와일드의 '예술론'에 심취했고, 그의 작품이 와일드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무력과 이념의 남북대결이 노골화되던 1960년대 말, 남북분단이래 가장 대규모의 대남지하 간첩조직이 세상에 알려졌다. 1968년 검거된 '통일혁명당' 사건이다. 통혁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았고, 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모두 북한으로 가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서했다.
이 셋은 검거 후 모두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들 중 김종태와 이문규는 최종판결 후 얼마 되지 않아 처형된다. 그러나 김종태의 친조카인 김질락은 살아남았다. '전향'했기 때문이다. '전향'의 辯은 삼촌의 꼬임에 빠진 자신의 과오에 대한 뼈저린 회한과 반성이다.
그는 자신을 "인간대열에서 떨어져 나간 한 낙오병"으로 비하한다. 뼈를 가는 반성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일 수도 있다. 그는 전향의 동기 등을 한 권의 책으로 쓴다. '주암산'이 그 것이다. '주암산'은 그가 평양에 갔을 때 머물던 초대소의 뒤에 있던 산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살아남지 못한다.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 15일 처형된다.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사법 처리의 올가미를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것인데, 남북 해빙의 무드에서 미국의 눈치를 봤다는 얘기도 있다. 종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바꾼다는 '전향'은 그 목적이 살아남는 것인데, 김질락의 그 것은 '실패한 전향'이 된 셈이다.
성일기라는 분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TV에 나왔는데, 아, 저런 기구한 역정을 지닌 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80 나이였으니, 지금은 고인이 됐을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남북분단과 대립의 한 가운데서 뒤죽박죽이 된 고난의 인생들이다. 경남 창녕의 만석꾼 집 4대 독자로 태어난 그의 누이동생이 북한 김정일의 여인이자 김정남의 어머니인 성혜림이다. 말하자면 북한의 한 때 '퍼스트 레이디'가 그의 누이동생이었다는 얘기다.
또 남한으로 망명했다 1997년 암살당한 이한영의 어머니 성혜랑도 그의 누이동생이다. 그는 서울 보성학교를 다니던 1940년대 말 남로당 간부였던 그의 부모를 따라 월북한다. '이상향'을 꿈꿨던 그와 그의 부모들에게 북한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적 쓰임새를 다한 전향한 부르주아'에 불과했고, 그런 그들에 대한 북한당국의 태도는 냉정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빨치산 교육을 받고 6.25직전 남하한다.
목숨을 걸고 투쟁한 빨치산 생활 3년 만에 체포된다. 그러나 그는 운 좋게도 '백두산 호랑이' 김창룡 덕분에 살아남는다. 그렇게 해서 남한에 정착해 살아왔다. 그런 그가 그때 왜 TV에 나왔을까. 그의 얘기 속에 그 답이 들어있다. "이념과 사상? 그 게 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약속한 이상을 믿고 인생을 바쳤는데, 지나보니 그 것들이 만든 세상은 쓰레기라는 것이다. 마지막 소원은 그저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 말했다. 그도 전향을 했을 것이다. 이 분의 경우는 어떤 형태의 ‘전향’인가.
#이종석#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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