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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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정도전(鄭道傳)과 소나무

by stingo 2020. 5. 27.

이 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풍운아 삼봉(三峰) 정 도전(鄭 道傳, 1342-1398)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 삶을 살펴보니 정 도전 인생역정의 중대한 고비와 관계되는 한 상징물이 나온다. 바로 소나무다. 정 도전의 운명적인 삶에서 때 놓을 수 없는 묘한 관계가 느껴지는 한 동반이 소나무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정 도전에게 소나무는 그의 56년 인생에 있어, 의욕적으로 포부를 펼치고자 했던 시작과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는 종장(終章)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선 정 도전이 이 성계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에 등장하는 게 바로 소나무다.

 

 


고려 말인 우왕 9년(1383년) 가을, 42세의 정 도전은 8년간의 오랜 유배와 방랑을 전전하며 체득한 고난에 빠진 민심과 세상의 인심을 바탕으로 동북면도지위사로 함주(咸州) 군영에 있던 49세의 이 성계를 찾아간다. 고려조를 뒤 엎기 위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단초를 논하기 위함이다. 이들의 첫 만남에 남겨진 의미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듬해 봄, 정도전은 다시 함주를 찾았다. 이성계의 군대가 호령이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본 정도전은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군영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있으니 소나무 위에다 시를 한 수 남기겠다”고 말하고는 노송 껍질을 벗겨내 시 한 수를 적는다. ‘咸營松樹(함주군영의 소나무)’라는 시다.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年相見否
人間俯仰便陳縱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구나”
    
이 성계의 호가 송헌(松軒)이었기에, 소나무는 이 성계를 가리킨다는 것도 정 도전의 소나무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한 대목이다. 시의 전반부는 모진 풍파를 견디며 변방을 지킨 이 성계와 잘 훈련된 그의 군대를 칭송한 것이다. 하지만 시는 좀 애잔한 느낌으로 끝을 맺고 있다. 훗날의 역성혁명을 기약하며 다시금의 만남을 고대하는 것으로도 읽혀지지만, 인간의 기약이란 결국 해묵은 흔적처럼 아득히 잊혀지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는 정 도전 자신의 비참한 말로를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성계를 만나 소나무, 곧 이 성계를 가리키며 이 시를 쓴 후 5년 만에 정 도전은 이 성계의 동반자가 되어 조선 개국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니,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 성계가 정 도전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등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정 도전은 이 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의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 도전은 조선 건국 후 7년도 채 못돼 정적인 이 방원에 의해 역적이란 불명예를 쓰고 참혹한 죽임을 당한다. 바로 세자 책봉을 두고 벌어진 '1차 왕자의 난'에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 도전의 이 죽음의 현장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정 도전은 1398년 8월 26일, 남 은. 심 효생. 박 위. 이 직 등과 함께 남 은의 첩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이 방원의 공격을 받고 그 집에서 죽는다. 정 도전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과 전언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편에 따르면 정 도전은 이 방원의 칼 앞에서 굴욕적으로 목숨을 애걸하다 이 방원의 칼에 쓰러진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또한 조선 내내 역적과 간신의 누명으로 남았던 정 도전이기에 그 신빙성에 의심을 받아왔다. 정 도전의 후손에 의해 쓰여진 '삼봉집'에는 전혀 딴 판인 정 도전의 최후가 나온다. 이 방원의 칼 앞에서 절명시 한 수를 지어 읊고 깨끗하게 칼을 받고 의연하게 이승을 떴다는 것이다.


이 상반되는 정 도전 죽음의 기록이지만, 하나 일치하는 것은 있다. 바로 그가 죽임을 당한 곳에 소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남 은의 첩 집이 있던 곳이 바로 ‘송현(松峴)’이다. 솔고개, 곧 솔 재라고 불리던, 소나무로 숲이 우거졌던 고개다. 6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곳의 지명은 ‘송현’이니, 곧 서울 종로구 송현동으로 옛 한국일보사가 있던 자리다.
정 도전과 소나무는 그가 죽기 전 남긴 절명시로 전해지는 시 한 구절에서도 그 관계의 상징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나무 정자에서 인생을 마감한다는 허망스러운 구절이 담겨있는 ‘자조(自嘲)’라는 시다.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온통 공을 들이고/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 년이란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놓은 업적이/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구나”
    
정 도전의 ‘자조’, 이 시는 꼭 10년 전 소나무 이 성계를 가리키며 쓴 시 ‘咸營松樹’와 맥이 닿아있다. 10년 전 시에서 정 도전은 인간의 기약에 대한 허망감을 드러내며 일말의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10년 후의 죽기 전에 쓴 ‘자조’에서 그 허망감의 결말을 한탄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결국 정 도전에게 소나무는 인생의 시작과 끝이었던 셈이다.

 

 

 

'삼봉집'에 실린, 정 도전의 절명시로 전해지는 '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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