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거실에 앉았는데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잡동사니를 쌓아놓은 테이블의 한 켠 책더미의 맨 위에 나를 봐달라는 듯이 보여지는 책이다.
작년에 세상을 뜬 친구의 유고집이다. 법관 생활 후에 변호사를 한 친구는 글쓰기를 즐겼고 나는 친구의 글쓰기를 성원했다. 신문 등에 칼럼을 기고하면, 그 전에 나에게 원고를 보내 봐달라고 하던 친구다.
친구의 유고집에는 그런 친구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친구 세상 뜨고 그 책을 받았을 때 펼쳐보기가 저어스럽된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러니 그냥 아무렇게나 테이블 책더미 속에 얹어둔 것이다.
오늘 갑자기 친구의 그 유고집이 눈에 들어오면서 새삼 친구 생각이 난다. 책을 펼쳤을 때 한 꼭지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노아의 방주'라는 글이다. 친구가 죽기 전 몇 개월 전에 쓴 글이다.
그 글을 봐달라며 나에게 보냈고 나는 그 글을 읽었다. 읽고한 후 말 할 수 없는 낭패감이 들었다. '노아의 방주' 그 글은 말하자면, 노아가 대홍수를 맞아 피안의 세계로 가면서 방주에 여러 생명체 등을 싣고간 것에 비유해 쓴 것인데, 나는 그 글에서 이 세상을 떠나가는 친구의 '유언'이 느껴진 것이다.
결국 그 며칠 후 잔뜩 술을 마시고 친구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내가 네 유언까지 봐야하는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심한 자책감이 인다. 친구의 쓸쓸한 얼굴이 그 글 위에서 아른거린다.
친구 일주기가 된 올 3월 나는 친구의 부인으로부터 뜻밖의 물건을 받았다. 친구가 생전에 쓰던 만년필이다. 친구 부인은 그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편 유품을 정리하는데, 친구 영문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필기구들이 나와 그걸 어떻게 할까를 궁리했다고 한다. 친구 부인은 문득 나와 마산에 계신 한 선배가 떠올려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편 생전에 친했던 친구와 선배에게 보내 간직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내 온 것이다. 그러니 그 만년필은 친구가 부인을 통해 나에게 보낸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친구가 보낸 '선물'은 몽블랑 롤러 볼(roller ball)펜이다. 케이스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몇번 쓰지 않았던 것인양 싶다. 볼펜 뚜껑에 이주흥 친구의 영문 이니셜인 'J. H. Lee'가 새겨져 있다.
친구는 가고 친구의 체취가 듬뿍 느껴지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을 보니 회한과 슬픔이 밀려왔었다.
그러고 몇 개월이 지난 오늘 아침, 친구의 유고집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모처럼 다시 펼쳐본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의 만년필도 다시 한번 꺼내 보았다. 친구의 '유품'들에서 마치 머나먼 먼 옛 일같은 아득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회한과 슬픔이 인다. 그리고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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