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한 당부가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도 들어가고 했으니, 네 몸 하나는 네가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네 몸을 보호할 운동을 하나 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게 태권도다.
당시 마산에는 태권도에 두 부류의 도장이 있었다. 창무관과 청양관이다.
창문관이 손놀림과 동작에 있어 수도를 쓰는 반면 주먹 형식의 정권을 쓰는 곳이 청양관이다.
나는 창무관을 택했다.
1960년대 당시 창무관이 마산에 여러 곳이 있었을 것인데,
나는 오동동 선창가에 있는 도장으로 가 태권도를 배웠다.
기억하기로 마산 창무관의 관장은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공 씨 성을 가진 분이었고,
오동동 도장의 사범은 정명훈이라는 분이었다. 나는 운동을 내 나름으로는 열심히 했고
한 두어 달이 지나면서는 차츰 씩 태권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태권도를 한다는 게 학교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내 동무들도 몇몇 오동동 청양관으로 들어왔다.
남성동 같은 동네에 살던 배철환, 오동동에 살던 노치군 등이다.
그리고 중학교 동창이면서 다른 학교에 다니던 김명원이 들어왔고,
이어 그 학교의 김수용과 오성철도 들어왔다.
이 사진은 그 이듬 해인 1968년, 그러니까 우리들이 고 2 때 배철환의 이층 집에서 함께 모여 찍은 것이다.
사진 뒷면에 찍은 해와 날짜, 그리고 이름들이 적혀있기에 알 수 있다.
날짜가 1월 29일이니 한 겨울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우리들은 도복을 갖고 가
추위에 벌벌 떨며 옷을 갈아입고 이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이 사진에 있는 친구들 가운데 두 명만 지금껏 알고 지낸다.
사진 뒷줄 오른 쪽의 배철환과 앞줄 왼 쪽의 노치군이 그들이다.
나머지 세 친구들은 그동안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한 친구를 며칠 전
전화통화를 통해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50주년(정확히는 53년) 행사가 열린 통영에 내려갔다가
두어 다리 건넌 전화통화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김수용이라는 친구다.
뒷줄 왼쪽이 그 친구로, 운동도 잘 했고, 그러니 싸움도 잘 했다. 김수용 이 친구는 특히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질 않고 뛰어드는 정의감이 남 달랐었기에 내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인물도 잘 생겼다. 그래서 내가 말론 브란도라 부르기도 했다.
이 친구와는 고 1, 2 때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많이 만났는데,
3학년이 되면서 뜸해지다가 대학 진학을 하면서 헤어졌다. 통영에서의 통화 이후 집으로 올라 와
그저께 긴 통화로 다시 만났으니, 물경 반세기를 뛰어 넘는 해후라 할 것이다.
친구도 내가 생각이 많이 나서 그리워했다고 하니 서로 간에 어떤 교감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는 아직도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현역이다.
5월 중으로 내가 창원으로 내려가 함께 만나기로 했다.
나머지 두 친구에 관한 소식도 통영에서 들었다. 오성철이라는, 뒷줄 오른 쪽 친구는 태권도를 계속해
7단까지 올라 태권도협회 전무를 역임했다고 한다. 한동안 브라질에서 생활하다 근자에
귀국해 마산에 거주 중이라고 하는데, 배철환이 어제 통화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앞줄 가운데 앉은 이가 김명원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는 불행스럽게도 일찌기 생을 마감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했다.
2004년인가 5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친구는 사업을 한다면서도 좀 허황된
소리를 하길래 나무란 적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후에 세상을 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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