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옛날 직장 후배가 정겨운 추억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 후배는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를 지내고 현재 모 언론사에 재직 중인 이영종 박사다.
위 사진 맨 아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 박사다. 후배는 자신이 북한과 통일관련 전문기자와 전문가로 성장해올 수 있었던 모태로,
그가 1990년대에 다녔던 내외통신사를 꼽으면서 저 사진을 올렸다.
위 사진은 내외통신사 창사 20주년 때 찍은 것인데, 1994년의 저 사진에 나는 없다.
나는 1990년에 13년을 재직한 내외통신을 그만 두고 다른 데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나는 1977년 보도국기자로 입사해 1981년 국제국으로 옮겨 차장으로 영문판 일을 하다가 다른 언론사로 옮겨갔다.
내가 빠진 저 사진에 나오는 분들 대부분은 잘 안다. 중앙에 앉은 분들 가운데 왼쪽이 김봉현 국장,
그리고 오른쪽이 내가 모신 국제국 이익상 국장이다. 가운데 두 분은 면식이 없는데, 아마 저 때 사장 등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면면들도 꽤 있다. 내가 재직 중일 때는 인원이 저렇게 많지 않았는데, 그 후 인원이 적잖게 보강됐던 것 같다.
이익상 국장 뒤 서있는 자그마한 분은 정봉욱 부장으로 나의 말하자면 ‘사수’였다. 저 선배 때문에 나는 한글판 기자를 하다
영문판 부서로 옮기게 됐다. 나중에 알고보니 자신이 영자지 코리아헤럴드 경제부장으로 내정 받아놓고 나를 땜빵으로 갖다놓은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영문기사를 쓰느라 고생깨나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일까, 정봉욱 선배는 나에게 술을 잘 샀다.
지금은 80이 넘은 연세에 서대문에서 혼자 살고 계신데 귀가 잘 안들려 통화가 어렵다.
정 선배 뒤 오른 쪽이 당시 총무부에 계셨던 문주학 차장이다.
고대 불문과를 나와 충무로 영화 일에 종사한 독특한 경력의 분인데 소문난 체인 스모커였다.
그 때문일까, 내가 나오고 얼마 후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저 사진 속의 저 분은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일 것인데,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가운데 키가 큰 분은 수신실에 계셨던 이석웅이라는 분으로 나와 잘 지내는 사이였다.
한 일년 전인가 통화를 한번 주고 받았는데 건강하게 잘 계신다고 했다.
이영종 후배는 자신이 입사 당시 받은 임명장까지를 올려놓고 있다.
발령받은 1993년 3월이면 나는 다른 언론사에 있었기 때문에 후배와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후배가 언제까지 내외통신에 있었는지는 모모르겠다. 내가 나오고 각 언론사에서 통일의 분위기를 타고
북한과 통일관련 전문기자를 스카웃하고 있었는데, 후배도 아마 그 무렵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후배 왼쪽에 다소곳이 앉은 후배가 김인구 기자인데, 이영종 후배보다는 선배일 것이다.
김인구 기자도 조선일보로 옮겨 일을 하다 지금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 있다.
나랑 이영종 후배는 또 다른 인연이 있다. ‘한국언론문화포럼’이라는 단체에 선배의 주선으로 나갔다가 거기서 후배를 만난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단체를 나가지 않지만 짦은 시기나따나 이영종 후배를 만나는 기회를 거기서 가졌던 것이다.
#내외통신#이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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