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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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by stingo 2020. 6. 23.

비슷한 주제의 두 권의 책이다. 죄악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한 것으로, 나치독일 히틀러의 악명높은 조력자 조제프 괴벨스와 아돌프 아히히만에 관련된 얘기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은 유대인 학살자 아히히만의 재판에 관한 기록인데, 이 책은 아렌트가 아히히만의 만행을 일컬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규정함으로써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이 책을 본 것도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 내려가면서는 그 주제가 잘 잡히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렌트가 아히히만의 교수형과 관련해서 딱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오히려 나치독일이 유대인 처리문제와 관련해 유럽의 각국별로 어떠한 말살계획을 세워 추진했는가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 같다. 물론 그 과정에 아히히만이 개입되기는 하지만, 장본인이라기 보다는 주변인 정도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이 아히히만에게 좀 동정적이지 않았냐는 일각의 비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아렌트는 아히히만의 범죄행위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아히히만 한 개인의 악마적인 속성이나 특성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군인으로서의 명령 이행 등 주변의 특수적인 상황이 그를 그런 지경으로 몰고가지 않았냐하는 생각이 든다. 아히히만의 여러 진술 중 "... 다른 무엇보다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대변하는 대목이 그와 관련하여 나의 시선을 끌었다.

 

 

이 책을 보면서 괴벨스의 개인비서이자 속기사였던 브룬힐데 폼젤이 떠 올려졌다. 106세로 2017년에 사망한 그녀도 자신의 자전격인 '어느 독일인의 삶'에서 괴벨스를 방조한 자신의 죄과에 대해 큰 양심의 가책없이 아히히만과 비슷한 넋두리를 하고 있다. 폼젤의 경우는 아히히만과 달리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좀 더 들여다 볼 여지는 있다. 그렇다고 방관자일 망정 폼젤이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변명으로든 아히히만의 죄는 용서될 수 없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인류의 기억 속에 아히히만은 최대의 반인류 범죄인으로 남아있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으로 아히히만의 죄과를 규정했지만, 그 개념은 아히히만 한 개인, 그리고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서성대는 '악'은 모두가 평범한 얼굴로 가장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에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치의 잣대를 지니고 산다. 그게 좀 나쁜 쪽으로 기울면 악행이 되고 착한 쪽으로 기울면 선행이 된다. 아히히만도 평범한 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아렌트의 분석대로라면 다만 그 잣대가 어떤 계기로 아주 나쁜 쪽으로 치우쳤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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