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5사면에 맞춰 부영 이중근 회장이 고향사람들에게 큰 선심을 쓰고 있구나.
그런데 이와 관련해 고향사람들이 이 회장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했으나,
이 회장이 고사했다고 하니 겸손의 미덕으로 이 또한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 이중근 회장의 미담과 송덕비 관련 기사를 보니 옛날의 어떤 일이 생각난다.
이 회장의 절친 중 한 분이 대한노인회장을 역임한 이 심 씨다.
1998년인가, 재력가인 이 심 씨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 가운데 '한국주택신문'이라는 특수신문사가 있었고,
이 분은 여기 회장이었다. 한 선배의 소개로 그 무렵 나는 이 신문에 임시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매주 발간되는 신문의 기사 아이템들을 챙기고 데스킹을 보는 일이었다.
어느 날, 회장실로부터 편집부장 호출이 왔다.
회장이 편집부장을 부른 건 부영의 이중근 회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이중근 회장이 무슨 무슨 좋은 일을
고향에 하는 바람에 고향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운다는 것인데, 그걸 지면에 될 수 있으면 크게 실으라는 지시였다.
부장은 그 지시를 나에게 전했다. 회장의 지시는 신문사의 전반적인 분위기 상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지상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장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단박에 거절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했을지언정 살아있는 사람의 송덕비를 세우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게 내 거절의 이유였다.
부장이 중간에서 난처해했다. 그걸 보고 그럼 내가 회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편집국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회장님 지시사항을 어찌 거절할 수 있는가 하며 나를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들의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리그리 해서 결론적으로는 이 회장 송덕비에 관한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는데, 그 과정이 어떻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 얼마 후 나는 그 신문사를 스스로 그만 두고 나왔다.
최대 광고주인 S그룹의 십수억짜리 아파트를 비판하는 사설이 나의 마지막 글이었다.
1년 후인가 어느 상갓집에서 이 심 회장과 조우했다.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이 회장이 나를 보면서
아니, 어떻게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나갈 수가 있어요 했다.
후에 듣기로 나의 그 사설 때문인지는 몰라도 S그룹 광고가 늘어났다고 했다.
그 날 만났을 때 회장은 이중근 회장 그 송덕비 관련 일은 까맣게 잊고있는 듯 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가 들고보니 내 생각도 그 때에 비해 많이 변했다.
좋은 일을 한 결과로 받들어지고 칭송되면서 송덕비 세우는 것에 살아있는 사람이면 어떤가 하는 쪽으로…
#이중근회장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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