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은 인간에게 필요한 기호물(嗜好物)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이 인간역사와 함께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술을 여럿이 마시는 대작(對酌)의 술자리에선 일체감을 돋우는 어떤 매너가 필요하다. 마시는 분위기, 혹은 함께 한 사람들의 면면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위기를 좋게 하고 기분 좋게 마시려는 추임새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건배이고, 말이나 구호로서 이를 부추기는 것이 건배사(乾杯辭)다.
그러니 對酌하는 술 문화의 음주방법이 乾杯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술자리에선 서로들 마시는 가운데 한마디씩 격려와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의 축원을 하는데, 부언하자면 같이들 잔을 맞대 마시자는 건배의 축원이 바로 건배사인 것이다. 李白의 將進酒辭에 나오는, 달빛 아래 술잔을 비워놓지 마라는 의미의 ‘막사금준공대월(莫使金樽空對月)’이라는 한 구절도 장진주사에 흐르는 분위기로 보면 멋진 건배사일 수도 있다.
건배사는 각 나라마다 다르고 세태의 흐름과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다. 영어권에서는 ‘치어스(cheers)', 독일 사람들은 ’줌볼(zum wohl)', 프랑스 사람들은 ‘아 보트르 상테(a votre sante)', 러시아 사람들은 ’나르드 로오비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살루테(salut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건배사는 무엇일까. 여러 건배사들이 있지만, ‘위하여!’가 아닐까 싶다. 이 건배사는 지난 1987년 당시 집권 민정당 대통령후보 축하연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설이 있는데, 아무튼 그 무렵 이후 이 ‘위하여’가 술자리의 단골 건배사로 유행을 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위하건 위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 말은, 이런 점에서 특정 집단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는 구호 같은 느낌을 준다.
각 대학에서는 이 ‘위하여’를 원용해 쓴다는데, 서울대에서는 ‘위해서’, 고려대에서는 ‘위하고’, 연세대에선 ‘위하세’, 이화여대에선 ‘위하리’, 한체대에선 ‘위하체’로 바꿔 각기 자기들 대학의 이름 한 자로 정체성을 부각하면서 술잔을 맞댄다고 한다. 이 외에도 무수한 건배사들이 인터넷에 나돈다.
‘건배사 모음’으로 검색하면 누구나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도 많고 얼굴 붉히게 하는 것도 많다. ‘빠삐따’라는 게 있는 데,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고’라는 뜻이고, 전 미국 대통령 이름을 딴 ‘오바마’는 ‘오늘은 바래다줄게 마시자’라고 한다. 괴팍한 성질의 트럼프 이름 딴 건배사도 찾아보면 분명 있을 것이다.
건배를 영어로 ‘토스트(toast)'라고 하는 점에서 이 게 영국 사람들의 음주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벌꿀 술잔에 토스트, 즉 빵조각을 띄워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토스트가 술을 머금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토스트!‘하며 마셨다는 설에 연유한다.
영국 해군에는 200여년 간 지속돼 온 토요일과 화요일 만찬의 전통이 있다. 이 만찬에서의 건배사도 200백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것인데, 그걸 2012년인가 바꿨다고 해서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토요일의 ‘우리의 아내와 애인을 위하여(to our wives and sweethearts)'와 화요일의 ’우리 사나이들을 위하여(to our men)'가 그 것인데, 각각 ‘우리 가족을 위하여(to our families)'와 ‘우리 수병을 위하여(to our sailors)'로 바꾼 것이다. 바꾼 이유는 여성 해군과의 성차별적 요소 때문이라고 한다. 군인 사회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들 마시는 이런 술자리에서의 건배조차도 성차별적인 요소를 감안해 마신다는 게 과연 건배의 종주국답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그렇게 마시는 술맛이 어떨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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