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가을 어느 날, 일산 롯데백화점 앞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났다. 하도 오랜 만이라 옛 얘기를 들춰가며 서로를 확인하곤 일산우체국 옆 벤치에 앉아 긴 얘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형은 조우를 기념한다며 갖고있던 원고뭉치를 나에게 줬다. 어제 책상 서랍에서 그게 나왔다. 원고 제목이 ‘촛불, 바람소리냐 비냐’다. 원고 앞 장 한 켠에 날짜가 적혀있다. ‘무자 가을 9월 22일.’ 맞다. 형은 그날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이라 했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개설 60주년 초청강연을 하고 오는 길인데, 강연을 끝내고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온 게 바로 그 원고였다. 그 때 형으로부터 원고를 받아 그냥 대충 보았다. 원고 내용이 뭐라기 보다는 지하 형을 만난 것에 감정이 쏠려 그랬을 것이다.
오늘 그 원고를 읽어보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촛불집회’에 관한 글이다. 원고를 쓰고 강연을 할 당시에만 해도 김지하 시인은 촛불 예찬론자였던 것 같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촛불은)한 개의 달이 비추지만 강물 위에는 천 개의 다른 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月印千江의 다양성”이라는 것. 덧붙여 “촛불집회를 통해 새로운 문명의 작동기재가 발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다른 이슈로 다른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라며 촛불집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아직도 촛불에 관해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absolutely not)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하 형의 근자의 활동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지난 해 4월인가, ‘五賊’을 연상케 하는 한 편의 통렬한 담시 ‘김지하가 吐할 것 같다’를 통해 문재인 주사파정권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서 지하 형의 이즈음 생각이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촛불의 의미가 문재인 정권들이 퇴색된 것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동의할 것이다.
문재인은 ‘촛불’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있다. 끄떡하면 촛불을 들먹이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집권이 이른바 ‘촛불혁명’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자주 내세우곤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더해 좀 밀릴 기미가 엿보이면 들이대는 것도 촛불이다. 지난 4. 15총선 때도 더불당의 총선 승리가 촛불혁명의 완성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쯤되면 촛불은 이미 그 의미에서 초심을 벗어나 퇴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이 나라에서 문재인과 그 류들을 제외하고 촛불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께 진보정치학자인 최장집 박사마저 문재인과 그의 집권 더불당에서 더 이상의 민주주의는 없다고 강조했듯, 문재인 정권의 ‘촛불’에 배신감을 토로하는 식상감이 특히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봇물을 이루고 있는데, 지하 형은 아마도 그 선두에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 만났지만, 지하 형은 그의 육필 원고를 통해 새삼 ‘촛불’의 초심의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좀 길게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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