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세상 역병으로 덕지덕지해 졌다. 나는 지리산으로 갈 것이다. 천왕봉을 올라 麻姑할매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영신봉 음양수를 마셔야겠다. 세상의 역병을 나는 지리산에서 털어버릴 것이다.
원지에 내려 단성 땅 운리로 간다. 해질 녘이면 좋겠다. 단속사 절 터 오누이 3층 석탑을 볼 것이다. 나의 지리산에 대한 초례(初禮}는 그 석탑이다. 지리산을 품에 안아 보낸 천년이다. 지리산 천년의 내음은 그리움이다. 품어도 품어도 갈증처럼 더해가는 그리움이다. 내가 그린 지리산도 그 안에 있다.
웅석봉으로 오를 것이다. 봄을 알리는 히어리꽃 나뭇 잎은 한층 짙어져가고 있을 것이다. 히어리는 추억이다. 지리산 이른 봄의 추억이다. 산 꼭대기 그 아저씨는 아직도 있을까. 산 지키고 불 지키는 그 아저씨는 곰을 닮았다. 그 말에 곰처럼 웃었다. 검수레한 얼골에 허연 이빨까지도. 내려오는 길, 옥수 흐르는 계곡에 철퍼덕 엎드린다. 물을 먹는다. 곰 처럼 마구마구.
추성동엘 갈 것이다. 마음으로만 오를 칠선계곡. 여적지도 가끔씩 자다가 그 때 꿈을 꾼다 . 칠선계곡을 내려오다 길을 잃었다. 뜨거운 여름날. 깊은 소에 빠졌다가 그대로 튕기듯이 솟구칠 제. 머리 위에 물뱀 한 마리가 붙었다. 쉬-이 쉬-이 했다. 날은 어둑해져 가는데 추성동은 얼마나 남았을까. 옥녀탕 부근 암굴에 소리하는 구신이 있었다. 나더러 고추장을 달라기에 돌팔매 시늉으로 쫓았다.
추성동엔 봄 물이 들고있을 것이다. 알싸한 봄 내음 속 첩첩의 바위산 길은 옛 그대로일까. 계곡 물은 봄빛 찰랑거리는 옥빛일 것이다. 옥녀탕 선녀탕을 지난다. 암굴은 예전 그대로 있을까. 수직으로 내리꽂는 칠선폭포는 장엄한 지리산 그 자체다. 마폭포 앞에서 오싹해지는 전율은 역설의 그리움이기도 하고. 천왕봉이 머지 않았다.
중산리로 내려갈 것이다. 꼭 볼 게 있다. 초입에 서 있는 천상병 시비. 마산 사람 시비가 왜 여기 있을까. 지리산이 시인에겐 하늘이었던 모양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했던 시인이 누워서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옛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이다. 예전이면 함양으로 갔을 것이다. 상림을 걷고 연리지 나무도 보고. 병곡식당 피순대국에 소주 한잔으로 산행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뿐이다. 몸 탓이지만 게을러졌다.
다시 산청군 단성면 운리로 가자. 단속사 곁 한적한 터에 친구 재형이 내외가 산다. 바지런히 오순도순 잘 산다. 이즈음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봄나물 속에 한창 바쁠 것이다. 재형이 집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할게 있다. 경화 씨가 만든 아침 샌드위치. 지리산 삐알의 각종 푸성귀로 만든 풍성한 샌드위치다. 어느 해, 전날 억수로 마신 술의 아침 해장으로 먹었다. 완벽한 해장이었다. 뜻밖이었다. 염치없지만 경화 씨에게 다시 부탁해 보자.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아니다. 빠뜨린 게 있다. 단속사 삼층석탑을 다시 봐야 한다. 역시 황혼무렵이면 좋겠다. 단속사는 내 지리산의 처음과 끝이다.
지리산으로 나는 갈 것이다. 훌훌 털어버리려 갈 것이다. 남부터미널에서 원지까지 버스만 타면 간다. 무슨 일이 있든, 나는 꼭 지리산으로 갈 것이다.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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