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는 한창 압축 성장을 위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다. 모두들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 아래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들 일했다. 마산도 예외가 아니다. 수출자유지역과 함께 공업발전을 기치로 창원공업단지가 조성되던 때다. 이런 급속한 산업화는 사람들 마음의 여유를 잃게 하는 측면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다 문득 한숨 돌려 뒤돌아봤을 때 몸과 마음을 위무할 공간이 그래서 필요하게 된다.
마산은 전통적으로 '주도(酒都)'라는 이름에 걸맞게 술집이 많은 도시다. 나이 좀 든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다 아는 '오동동 타령'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오동동을 비롯한 마산 도심의 당시 술집들은 나이 좀 들고 돈께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 가는 술집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이쯤의 취향에 맞는 술집이 도심에 있었는지는 기억에 별로 없다.
술 마실 돈도 없었고, 그저 만만했던 게 남성동 선창가의 바닷가에 반쯤 걸쳐져 얼기설기 늘어서있던 포장 술집이었고, 여기에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 마셨다. 이 포장술집들이 있던 곳을 '홍콩빠'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이름 지어진 연유는 이 책의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마산에는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학식께나 있는 대학생들이 가서 마실만한 술집이 마땅찮았다. 암울한 군사독재시절, 사회흐름과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가 한창 왕성할 시기인 이들이 서로끼리, 혹은 선배들을 만나 인생과 철학, 문학과 예술을 논하면서 한잔 술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에 다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젊은 청년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술집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바로 조남륭의 '음악의 집'이 이런 측면에 맞닿아 있다.
이 필연의 한 가운데 누구보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고 젊은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을 아꼈던 조남륭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마산 창동의 '음악의 집' 하면 조남륭이고, 조남륭하면 '음악의 집'이라는 연상관계가 당시 마산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음악의 집'이 없다. 그러나 조남륭은 이제 80 나이지만 아직도 창동 뒷골목에서 그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있다.
조남륭이 북마산의 옛 문창교회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간판도 없는 클래식음악 전문의 주막을 연 게 1971년이다. 그는 원래 마산사람이 아니다. 경기도 출신인 조남륭은 6.25사변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어떤 계기로 마산에 정착한다.
"외가가 의령에 있었는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마누라(엄학자)를 만나 결혼했지. 그렇게 살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자 마산으로 들어왔지."
마산에서 클래식음악을 틀어주는 주막을 낸 것은 물론 호구지책의 일환이지만 좀 기이하다. 내남없이 어려웠던 시절, 뭐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라 가릴 게 없을 것이지만 왜 하필 클래식음악 전문의 술집이었을까. 이는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 조남륭의 로맨티스트적인 취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6.25사변을 전후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클래식에 매료된다. 그 어렵던 부산 피난시절에도 그를 달래줄 수 있었던 것은 클래식음악이었다.
"클래식음악이 좋았어. 그 험한 시절, 싸우지 않고는 못 견딜 때 음악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악인이 됐을지도 모르지. 광복동 아폴로와 칸타빌레 음악실, 미화당 음악궁전, 부평동 오아시스 등 정말 많이 다녔지."
이런 취향을 바탕으로 간판도 없이 연 골목집 주막은 초라했다. 외형상 그랬다. 탁자 한 두개에 두부를 안주로 한 막걸리를 내놓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내용은 풍성하고 넉넉했다. 항상 틀어 놓는 클래식음악 때문이다. 울려나오는 음악 때문에 '베토벤 집' '음악의 집'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회자되다가 어느 시점인가 '음악의 집'으로 정착하게 된다. 당시 새어 나오는 음악을 듣고 그 집을 찾아들어가 단골이 된 사람들도 많은데,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서울로 유학 간 학생들이 방학이면 내려온다. 앞서 언급했지만, 당시 대학생들로서는 이런 공간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요즘처럼 넘쳐 흘러나던 시대가 아니다.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아 면 단위에서 몇몇 정도의 대학생이 있을 시기다. 자연히 대학생들은 자부심이 강했고, 새로운 문화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그런 문화가 사회를 계몽해야한다는 인식들이 있었다.
조남륭의 '음악의 집'은 청년대학생들의 이런 생각과 문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에 알맞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밤이면 시벨리우스와 스메타나의 음악이 흘러 넘쳤다. 청년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철학과 문화, 그리고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놓고 토론하면서 음악에 젖었고 조남륭은 이런 북적거리는 광경을 즐기면서 함께 마시고 함께 토론했다.
'음악의 집'은 1973년 창동 불종거리 코아 맞은 편 옛 삼성약국 뒤 목조건물 2층(현 만미정 자리)으로 가게를 옮긴다. 아마 이 무렵이 '음악의 집'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청년학생들은 물론이고 마산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들락거린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두남, 정진업, 안윤봉, 박재호, 최운, 김봉천, 안병억, 이선관 등 마산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사들이 단골이었다. 당시 경남대에 출강하던 구상 시인도 즐겨 드나들었다. 군복무 중이었던 이성복 시인도 단골이었다.'음악의 집'은 마산사람들만 찾는 곳이 아니었다.
마산의 재경대학생들 간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운동권학생들이 이 집을 많이 찾았다. 유신독재시절, 마산은 운동권학생들이 선호하는 일종의 '도피처' 역할을 했다. 3.15의거라는 민주항쟁의 본거지라는 역사적인 의미에다, 당시 핵심 운동권학생들 가운데 몇몇이 마산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이와 함께 '오적'의 김지하 시인이 가포결핵요양소에 연금된 사실도 그에 한 궤를 보태는 요인이 된다. 김 시인은 당시 그의 말대로 요양소 '월담'을 잘 했다. 그리고는 마산으로 나와 후배들과 만났다. 그 장소 가운데 물론 '음악의 집'도 있고, '홍콩빠'도 있다. 서강대 S 교수, 부산대 C 명예교수 등도 당시 마산에서 '음악의 집'을 한번쯤은 드나들었을 운동권 핵심학생들이다. 수필가 김소운 선생의 아들인 김인범도 있다.
그 시절의 '음악의 집'하면 우선 생각나는 게 삐걱 소리 나는 나무계단이다. 그 소리가 알맞게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와 앙상블을 이룬다고나할까. 문을 열어 들어가면 뿌연 담배연기 속에 오른 쪽 검은 벽을 가리는 그림이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하는 모습이다. 또 있다. 베토벤이다. 베토벤이 악보와 함께 '하일리겐슈타트의 편지'의 한 부분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실은 출입문 맞은편이다. 투명유리 안쪽으로 클래식 LP판이 빽빽하게 들어찬 게 보이고 턴테이블 위로 판이 돌아간다. 음악실 출입은 제한이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알고지내는 사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누구든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들어가 틀고 듣는다. 그들 가운데 유독 음악실을 제 것인 양 드나들던 한 친구가 있다. 고려대를 다니다 방위근무를 하고 있던 친구였는데, 지금도 그는 자기가 '음악의 집' 유일의 디스크자키였음을 자부하고 있다. 이 시절, 드나들던 단골들 가운데 조남륭이 아끼던 후배가 있었다. 이선관 시인이다. 지난 2009년 타계해 지금은 '창동허새비'로 마산 문화계에서 기리고 있는 마산의 저항시인이다. 선천성 뇌성마비로 거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이선관을 조남륭은 많이 살피고 보살폈다. 그를 결혼시킨 것도 조남륭이다. 이선관이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이상 진척(?)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어느 날, 조남륭은 자기 집을 비워준다. 둘이 함께 있으면 무슨 사단이라도 벌어지겠지 하는 배려에서다. 결국 이선관과 그 여인은 조남륭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사단이 있고 없고는 알 수 없으되 하여튼 둘은 그 얼마 후 결혼을 한다. 조남륭에겐 안타까운 기억도 있다. 이선관이 타계하기 며칠 전, 함께 점심을 하자며 그의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마침 밥을 이미 먹었던 조남륭은 "너거끼리 묵어라"며 가지 않았는데, 그 며칠 후 이선관은 세상을 뜬 것이다.
이런 전성기 시절, 조남륭의 '음악의 집'은 장사가 잘 됐다. 종업원 몇을 둘 정도였고 돈도 좀 벌었다. 그러나 돈이 쌍이지는 않았다. 조남륭의 돈에 집착하지 못하는 천성 탓이다. "돈 있어도 쓸데가 없었다"는 게 조남륭의 얘기다. 돈이 벌렸지만 쌓이지 않는 이유는 조남륭의 그런 천성에다 희한한 술값 계산법도 일조한다.
그는 돈이 없는 손님에게는 돈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내고 없으면 그냥 가도 된다는 계산법이다. "가난한 예인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예술 하는 너거들 돈 없어도 한번 실컷 먹고 마셔봐라"하는 심정으로 가계를 했다는 게 조남륭의 회상이다. '음악의 집'이 시인과 음악가. 화가. 교수 등 가난한 문인과 예인, 학자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었던 이유가 분위기도 물론 그랬지만, 가난한 문인과 예인을 아끼는 조남륭의 로맨티스트로서의 기질 때문이었다는 얘기로 귀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돈에 집착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돈이 조금 모이면 나눠주고 갈라주기에 바빴다는 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전언이다. 특히 그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꽤 있다. 돈이 없어 등록금을 못 내면 대신 내주고, 서울 갈 차비가 없으면 차비도 주고 생활비도 대줬다. 돈이 수중에 없으면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줬다는 웃지 못 할 얘기도 있다. 부창부수랄까, 조남륭의 부인 엄학자 또한 정 많기로 유명했다. 이미 문을 나선 사람을 뒤쫓아 가서 차비를 쥐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이 부부는 '가난한 학생과 예술인들의 부모'와도 같았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런 조남륭에게 불운이 온다. '음악의 집' 창동시절의 막이 내리는 것이다. 1977년 건물 주인이 장사 잘 되는 걸 알고서는 가게를 빼 달라 한 것이다. 별 수가 없었다. 창동 목조건물의 그 가게를 비워주고 옛 중앙극장 인근으로 옮긴다. 그러나 창동시절의 '음악의 집'이 아니었다. 시기적으로도 창동시절 들락거리던 많은 단골 학생들이 대부분 사회로 나오면서 발길이 뜸해졌고 그들이 주도하던 '음악의 집' 분위기도 사그라져 갔다. 여기서 조남륭은 별 재미를 못 보고 '음악의 집' 간판을 내린다.
'음악의 집' 간판을 내린 후 조남륭은 80년대를 온전하게 가족을 위해 살았다. 아이들 공부시키고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숙집도 해보고 구둣방도 해 봤다. 늦은 나이에 월급쟁이 회사원생활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천성이 어딜 가겠는가. 그를 다시 '음악의 집'으로 돌이켜 세운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알고 지내던 후배의 권유로 그 후배가 하던 실비주점을 하게 된다. 그 집이 지금의 '만초'로, 창동 불종거리 코아 건너편 골목에 있다. 이 실비집의 분위기도 옛 '음악의 집' 그대로지만 옛 같지는 않다. 조남륭도 아내 엄학자와 함께 늙었고, 옛 '음악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이미 이 세상에 많이들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남륭이 고수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이다. 항상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음악 속에서 조남륭은 세상을 보고 세상 사람들을 본다. '만초'가 '음악의 집'과 다르지 않은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결코 야박하지 않는 인심과 배려가 있다는 점이다.
차림표도 가격표도 없다. 문 열고 닫는 시간도 달리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조남륭이 있고 문이 열려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저 마신만큼 돈을 내면 된다. 찾아온 사람이 배가 고프다면 밥을 내주고, 라면을 끓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밥값을 술값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같은 차원인지는 몰라도 술값만 받는 것도 특이하다. 아내인 엄학자가 내놓는 안주는 수수하다. 두부, 멸치, 콩나물 무침이나 생선조림 등이고 감자, 고구마, 옥수수 삶은 것도 나온다. 물론 이들 안주는 공짜다. '만초'에서 술을 마시면서 조남륭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옛 시절의 그가 나온다. 낭만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만초'에 가면 볼만할 게 또 있다.
벽면에 붙여져 있는 사진들이다. 한쪽 벽면을 빽빽하게 차지하고 있는 수백 장의 사진들은 모두 인물사진이다. '만초'를 다녀갔던 사람들인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다. 언젠가 들렀는데, 사진을 찍는다. 얼마 후 다시 갔더니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이런 조남륭의 행위 속에 그의 낭만과 사람 좋아하는 성품이 묻어난다. 추억도 있을 것이다. 그 추억 속에서 조남륭은 1970년대 '음악의 집'에 영원히 머물고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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