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3. 19)짜 종이신문 중앙일보,
황인 후배가 쓴 ‘예술가의 한끼’ 이병주 선생 편 글이 옛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마산의 안윤봉 선생이 나오고, 월남다리 아래 ‘화신순대국’도 나온다.
또 ‘외교구락부’도 나오고 샹하이 박도 나온다.
이 모두들 과거에 나와 직간접적으로 엮여져 있는 파편같은 소재들이다.

‘화신순대국’ 집은 1977년 초 마산에 6개월 가량 있을 적에 우리들의 일종의 아지트였다.
곱상하신 아주머니는 천사 같았다.
3만원 견습기자 박봉이지만, 그 쥐꼬리 돈이 그 집에서는 은이 났다.
돈 걱정 말고 드세요. 아주머니의 입에 달린 게 이 말이었다.
아주머니는 안윤봉 선생의 제자였다. 안 선생을 모시고 많이 갔다.
거기서 이병주 선생도 만나고 소프라노 이규도 선생 등도 만났다.
그 집은 안 선생을 만나러 서울서 내려오는 분들을 맞는 곳이었다.
반공연맹 분실장이 검은 찝차를 타고 와 호기를 부리다 나와 다투기도 했다.
1977년 서울로 올라온 후 아주머니를 딱 한번 봤다.
1979년인가 마산 중성동에서 큰 한식집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내가 찾아보지를 못한 것이다. 지금 쯤 80을 훨씬 넘겼을 터인데,
어디서 어떻게 살고계신지 궁금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황인 후배는 이 기사를 쓰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1970년대 중반, 마산 신문사 시절의 안윤봉 선생
이병주와 안윤봉 선생과의 마산에서의 관계를 취재차 물은 것이다.
두 분은 아주 친한 사이였고, 술들을 좋아하셨다.
두 분과의 그런 술자리에 내가 끼어들 수 있었던 건 나로서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이병주 선생의 박식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안윤봉 선생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그러니 술자리는 항상 여러가지 얘기들로 질펀했다.
여기 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얘기했지만,
주지하다시피 안윤봉 선생은 그 무렵 레드컴플렉스에 한창 젖어있을 때다
내가 반공연맹 등 반공단체 사람들과 자주 다퉜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안 선생을 그런 이념의 굴레에 묶어 하대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황 후배의 이 기사에서 나오지만, '이스크라'에 얽힌 얘기는
안 선생의 그런 이념의 굴레와 관련해 처절한 그 심경의 일단을 표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두 분의 술자리에서 내가 '이스크라' 얘기를 꺼낸 것인데,
그 배경은 좀 딴판의 것이었다. 나의 대학 졸업논문이 북한 언론에 관한 것이었는데,
거기에 레닌의 언론관이 언급되고 있다. 레닌의 소련공산당 기관지 이름이 불꽃이라는
뜻의 '이스크라'여서 어쩌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그때 두 분이 이스크라! 이스크라!하며
동시에 거의 외치다시피 한 것이다. 딱 그 뿐이다.
두 분이 왜 그랬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나는 다만 상상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드 컴플렉스'로 살다 간, 馬山의 '문화인' 안윤봉(安允奉)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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