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시절의 한 여름, 어떤 '도식(盜食)'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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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시절의 한 여름, 어떤 '도식(盜食)'의 추억

by stingo 2020. 6. 26.

송악 OP에서의 군 시절, 나는 식사배달 병이었다. 그러니까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의 OP 중대본부 식사를, OP 산 아래 화기소대 식당에서 마련해주는 것을 배달해오는 역할이었다. 매끼 식사 배달은 간단하다. 지게에다 바케스 두 개를 매달아, 한 쪽은 밥, 또 한 쪽은 국을 넣어 짊어지고 오는 것이었다. 김치 등 부식 몇 가지는 사흘에 한 번꼴로 갖고 와 중대본부에 보관해놓고 먹었다.

 

OP에서 화기소대를 오가는 길은 산길이다. 거리로는 한 7, 8백 미터쯤 되는데, 오르락 내리락하는 길이다. 그 산길을 20여 명 분의 밥과 국이 든 지게를 매고 매일 오르내리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여름철 무더운 날씨엔 한 번 오르내리면 녹초가 된다. 요령삼아 중간에 좀 오래 쉬기라도 하는 낌새가 보이면 고참으로부터 득달이 난다. 시어머니 같은 유 병장으로부터 '엄명'이 있었다. 중간에 딱 한 번만 쉬어라. 내가 시간을 체크하겠다. 어떻게 체크할 줄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까다롭기로 소문난 유 병장이 그러니 신참 졸병 신세로서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쉬는 장소는 거의 중간 지점으로 산 길 곁의 수목이 울창한 평평한 등성이다. 거기서 대략 5분 정도 쉰다. 그 해, 그러니까 1973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DMZ는 기후가 일반 지역에 비해 좀 거칠다. 겨울은 더 춥고, 여름은 더 덥다는 말이다. 그 무더운 여름날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면 입고있는 포대런닝이 흠뻑 젖는다. 산등성이 쉬는 곳에서 하는 짓이란, 포대런닝을 벗어 빨래처럼 뭉쳐 땀을 짜내고 새로 입는 일이었다. 그러면 땀이 과장을 좀 보태 한 대야 정도는 짜졌다.

 

저런 폼으로 나는 밥통과 국통을 매고 OP 중대본부까지 끼니를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였다. 쉬는 장소에서 지게를 풀어놓고 쉬고 앉았는데, 바케스에 든 국 메뉴가 퍼떡 생각났다. 그 날은 여름 특식으로 닭고기 국이었다. 국이 든 바케스 쪽으로 가까이 코를 기울이니 맛있는 닭고기 냄새가 솔솔 났다. 나그 가지를 꺾어 국을 휘저었다. 뭉툭한 닭고기가 수북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입이 우선이었다. 닭고기 한 토막을 꺼내 먹었다. 그 맛을 무슨 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 말 틀린 게 없다. 훔쳐먹는 게 더 맛있다는 것. 배 속에서 야단이 났다. 더 넣어달라고 보챈다. 두어 토막을 더 꺼내 먹었다. 이래서 되는 일인가 하는 양심이 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나름의 보상심리도 움직였다. 이리 무더운 날, 여러 사람들 먹이려고 혼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데, 까짓것 그 고기 몇 점 먹는다고 누가 뭐라할 것인가. 내가 이렇게 고기를 몰래 꺼내 먹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그 이유가 타당한 것이다, 암만...

 

닭고기를 먹은 흔적을 지워야 했다. 몇 안 되는 닭뼈를 모아 근처의 땅에 묻었다. 이 산 중에서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을 설마 누가 볼 것인가하는 자신감이 들면서 나는 점점 떠 뻔뻔스럽고 대담해져 갔다. 그 여름, 특식이 나오는 날이면 거의 매일을 그런 식으로 나는 닭, 소, 돼지 등 중대원들의 먹거리 일부를 '도식(盜食)'하면서 나름의 합리성을 더 한 영양을 불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 들통이 나고 말았다. 역시 유 병장이었다. 물론 그 전에 그런 낌새가 있긴 있었다. 유 병장이 어느 날 화기소대 취사병에게 전화하는 것을 들었다. 어이, 요새 특식에 고기가 많이 줄었어. 무슨 이유가 있어? 거의 맹탕이야, 맹탕! 나는 속으로 좀 뜨끔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고기 양이 준 것을 취사병에게 따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는 혐의점을 두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유 병장은 게슈타포라는 별명에 걸맞게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으면서도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이겠는가.

 

그 날도 점심식사 지게를 매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중간의 쉬어가는 지점을 올려보는데, 숲 속으로 뭔가 어떤 형체가 언뜻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설마 작정을 하지 않는 한은 거기에 있을리가 만무했으니, 노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움직이는 형체는 뜻밖에도 사람이었다. 그것도 바로 유 병장이었다. 유 병장은 숲 속에서 나와 장승처럼 선 자세로 나를 아래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흐미하게 웃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 같았다. 나는 숨찬 자세로 등성이에 올라 서 유 병장 앞에 섰다. 유 병장 손에 뭔가가 한 무더기 들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것은 뼈조각들이었다. 내가 먹고난 후 나름 신경을 써 묻어놓은 닭과 소, 돼지 뼈들이었다.

 

유 병장은 그러니까 내가 처음 도식을 시작한 그 무렵부터 특식에 들어가는 고기의 양을 화기소대 취사병으로부터 세심하게 체크하면서 고기가 줄어드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며, 그 혐의를 이미 나에게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 대해 별다른 반응없이 지켜본 것은 증거를 확보해 나를 완벽하게 옭아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유 병장은 내가 쉬는 장소가 어디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곳을 탐사해 고기 뼈들을 발견해낸 것이다.

 

나의 도식에 대한 후과는 좀 혹독했다.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그랬다. 우선 나는 유 병장의 완전한 수하가 됐다. 별 짓을 다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물었고, 모든 까다로운 일을 나에게 시켰다. 나는 그의 모든 일에 일일이 답해주는 처지가 된 것인데, 군댓 말로 거의 따까리 노릇을 한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연애편지까지 대신 써줘야했다. 아마도 그 해 후반 내가 어떤 사고로 임진강을 건너 페바(FEBA) 지역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전역 때까지 그의 수족 노릇을 했을 것이다.

 

 

 

사진 뒤에 써 놓은 글귀. 1973년 8월 29일이다. 무척 더운 날이었다. 포대런닝은 완전 땀에 절어, 벗어서 짜면 땀이 빨래물처럼 줄줄 흘렀다. 바께쓰에 오줌이라? 완전 불만에 쩔은 한탄조의 신세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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