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소령(碧宵嶺)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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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碧宵嶺)의 달

by stingo 2020. 6. 7.

 

지리산 종주길에 비를 맞는 것은 흔한 일이다. 비가 오고 안 오고를 가늠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1,500미터가 넘는 산군을 품은 하늘의 기운을 인간의 잣대로 가늠질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비가 오면 맞고, 안 오면 안 맞고 오르내리며 걷는 길이 지리산이다.

비는 새벽부터 뿌려지고 있었고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 새석평전을 거쳐 벽소령으로 가는 지리산 산길은 비와 구름의 천지다. 벽소령은 지리산 능선 종주길의 중간 쯤에 위치한 탓에 하루를 묵어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하동 화개면과 함양 마천면을 이어주는 이 고개의 이름이 '벽소(碧宵)'라는 게 참 낭만적이면서 지리산에 걸맞다.

푸른 밤이라는 뜻의 이 말은 달(月)이 함께 해야하고 그에서 연유한다. 겹겹이 쌓인 산위 하늘로 떠오른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띤다는 '벽소명(明)월'이 그 것인데, '벽소한(寒)월'이라고도 하며, 벽소를 푸른 하늘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벽소령의 달이 그렇다. 그래서 지리산의 열가지 명경(明景)가운데 네번째가 '벽소령의 달'이다. 그러나 벽소령의 달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왕봉의 일출 보는 것에 견줄바는 아니지만 변화무쌍한 일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 일기예보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저 운에 맡기는 게 상책이다.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과 세석평전을 거쳤다. 이제는 하루를 묵어 갈 벽소령까지다. 비에 젖은 옷과 질척이는 신발로 벽소령으로 향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내심 밤이면 비가 그쳐 벽소령의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벽소령에 도달하기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고, 그 상태로 벽소령의 밤은 초여름의 비속에 젖고 있었으니 달에 대한 기대는 일치감치 접었다.

다음날 신새벽. 날은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이미 벽소령의 달은 생각 속에서 날라가 버렸고, 마음은 노고단까지 가는 종주길에 쏠리면서 바빠진다. 모두들 차비를 하고 대피소를 나선다. 연하천으로 향하는 초입의 푸른 숲길로 들어서려는데, 웬지 이마가 간질거린다. 뭔가가 하늘에서 당기고 있는 느낌이다. 하늘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형제봉 위 푸른 하늘에 뭔가 떠 있다. 달이다. 지리산 높은 청공(靑空), 푸른 하늘에 뜬 하얗고 예쁜 달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밤에 뜨는 벽소령의 달로 '벽소명월'로 삼아야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밤에 뜨는 달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언제든 벽소령에 뜬 달이면 벽소령의 달이 아니겠는가.

지리산은 밤에 못 보여준 달을 이른 아침에우리들에게 내어 주었다. 지리산의 넉넉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지리산은 전날 온 비로 더욱 화창한 푸름을 빛내고 있었고, 우리들은 다시 그 속에 텀벙 뛰어 들었다.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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