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전우가 그리운 6. 6일 현충일, 그리고 김영준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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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우가 그리운 6. 6일 현충일, 그리고 김영준 대위

by stingo 2020. 6. 6.

다시 6월 6일 현충일이다. 매년 돌아오는 현충일이면,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의 염과 함께 되살아나는 추억이 있다. 젊은 날 군 시절에 대한 추억이다. 나는 1973년 육군 1사단에 배치돼 6개월 간의 개성 바로 앞 '송악OP' 근무 후 임진강을 건너 파주 광탄 1사단 사령부 통신보급대에서 근무했다. 주특기는 280, 그러니까 무선정비병이다. 하지만 나는 시설보급일을 맡아 참모부 통신보급대 행정서기병으로 근무했고 거기서 제대했다.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먼 옛날이다. 잊어먹기 전에 한번 생각하고 기억해 놓자. 사단장으로는 김봉수 장군, 통신참모로는 이희달 중령, 보급관으로는 이정복 대위, 김영준 대위(한 분을 더 모셨는데,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선임하사로 박종진 중사, 통신보급대 대원으로는 내 사수였던 정 병장, 그리고 고참으로 이진일 병장, 권순도 병장, 윤종규 병장, 임인배 병장, 내 아래로 이상일, 이길섭, 안계정, 그리고 한 머시기, 김 머시기 등.

 

이들 가운데 고인이 된 분들도 많을 것이다. 확인한 것은 2012년에 돌아가신 김봉수 장군 뿐이다. 나머지 분들은 모르겠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도 모른다. 이정복 대위는 1979년 어느 날, 영등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을 때 우연히 막 그 버스를 타려 군복 차림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결국 이정복 대위는 그 버스를 타지 못했고, 나는 그 분을 뵈올 수 없었다. 권순도 병장은 제대 후 명동의 유명한 식당인 '신정'의 지배인으로 있던 1979년 한번 만났다. 임인배 병장과 이상일, 이길섭, 장 머시기들과는 제대 후 한 두어 차례 만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소식들이 뜸하다.

 

1975년 초 당시 보급관이었던 김영준 대위와 함께 한 전우들. 고참들은 다들 이미 제대했다. 뒤 맨 가운데가 임인배 병장, 가운데 맨 왼쪽이 나, 한 머시기, 윤종규 병장, 안계정 일병, 이상일 일병, 이길섭 일병, 그리고 가운데 앉은 분이 김영준 대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김영준 대위다. 내가 제대 후 복학해 학교를 다니고 있을 적에 직접 나를 찾아왔던 분이다. 그 때가 1976년인데,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른다. 나에게 잊지못할 기억을 남긴 분이었기에 10여년 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여태 찾아지지가 않는다. 3군 사관학교 출신이라, 요로요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 봐도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각하건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어두운 느낌이 든다. 아직 그래도 찾아 보지만, 아마도 내년 현충일부터는 추모로 방향을 바꿔야할 것 같다.

아래 글은 2011년에 이어 2018년 김영준 대위를 찾으며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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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대위)

아직도 그 양반은 내 기억속엔 '대위'다. 1975년 당시 그 계급 그대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렇다. 지금 얼추 70 나이 쯤 됐을 것이다.

1975년 파주 광탄 1사단 사령부 통신중대. 김 대위는 보급관, 나는 행정서기병, 속칭 서무계였다. 계급이나 군적인 관계를 떠나 둘은 참 친했다. 김 대위는 그 때 미혼이었다. 광탄 신산리 민가에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일과시간이 끝나는 저녁 무렵이면 나는 으례 김 대위와 같이 '퇴근'하곤 했다. 광탄 거리 술집에서 사복차림으로 술 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가끔은 자전거를 빌어타고 자유의 다리까지 갖다오곤 했다. 김 대위 하숙집에서 이른바 '사제 밥'도 많이 얻어 먹었다. 내가 제대하기 전 김 대위는 전출을 갔다. 강원도 화천으로. 그 후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는데, 하여튼 그 후로 헤어지게 됐다.

1976년 4학년 복학을 하고, 취직공부를 나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일 것이다. 공부 그렇게 열심히 해 보기는. 공부 운운의 이 말을 덧붙이는 이유가 있다. 9월의 어느 날인가, 학교 도서관에서 거의 밤을 새운 후 흑석동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하숙집으로 가고 있었다. 멀찍히 뒤에 누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이, 어이. 누군가 싶어 뒤돌아 봤더니 어떤 군인이었다. 손을 흔들고 다가오고 있는데, 어라, 이게 누구인가. 바로 김 대위였다. 참 극적인 재회였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화천에서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와 과를 알고 있었기에 학교에 가서 문의를 한 후 하숙집에 가서 물었고, 목욕 갔다고 하니 하숙집 부근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학생이라 돈이 있을리 없다. 하숙집에서 몇 천원을 빌렸다. 군인 아닌가. 민간인인 내가 당연히 써야하는 것 아닌가. 생맥주 집에 가서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돈이 딸랑 거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취직한 후배에게 연락을 했더니, 신촌의 어떤 일식당 집을 알으켜주며 그곳에서 먹고 마시라고 했다. 후배 말대로 그 집에서 또 마셨는데, 아무래도 돈이 없으니 신이 나질 않는다.

결국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신촌시장 안의 순대국밥 집엘 가서 외상으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솔직하게 사정 얘기를 했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없다. 모처럼 만났는데, 대접이 시원찮아 미안하다. 그런 말을 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대위. 갑자기 뒷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더니 뭔가를 꺼낸다. 두툼한 봉투다. 손에 든 그 봉투를 탁자 위에 탁 치며 내려 놓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 "돈 없다고 그러냐. 김영철이 답지 않게..." 봉투 안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한 백만 원을 됐을 것이다. 엄청 큰 돈이다. 나하고 만날 날을 고대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돈을 오늘 밤 다 써자고 했다.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하루 밤에 다 쓸 수 있을까. 당시로는 최고 시설이었던 신촌의 '대야성'에 큰 방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맥주 한 박스를 시켰다. 둘은 그리고 밤새 마셨다. 엉망으로 취해 노래도 부르고 부둥켜 안고 울기도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다음 날 아침. 김 대위는 귀대하기 전 나하고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어디로 했더니 책방이라고 했다. 부대에서 읽으려는 책을 사려는가 싶었다. 이화여대 입구에 책방이 있었다. 책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명령하듯 말 한다. "어이 김 상병, 여기서 니가 필요한 책을 골라 봐라." 김 대위는 나에게 책을 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순간 말을 잃었다.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꼭 필요한 책이 있었다. 한 서너 권 골랐다. 김 대위는 그걸 보더니 더 골라 담아라 한다. 10여 권이 넘는 책을 김 대위가 그 때 사주었다. 김 대위는 그 책들마다 일일이 내 눈에 익숙한 자기 사인을 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공부 열심히 해라. 명령이다." 그리고 헤어졌다. 그 후 다시 한 번 만나 이문동에 있는 김 대위 형님 집을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김 대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문동 집의 기억을 살려 찾아갔더니 이사를 가고 없었다.

김 대위는 3군사관학교를 나왔고, 고향은 전북 김제인 걸로 알고 있다. 3군사관학교에 문의를 해보곤 했는데, 여태 찾지를 못하고 있다. 김 대위를 찾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위에서 공부 운운의 말을 한 이유는 이렇다. 그 날 김 대위와 만나 밤을 새우고 헤어진 후 공부에서 다시 멀어지게 됐다. 그 때문에 그 얘기를 덧붙였다. 왜 그렇게 됐는지 그 이유는 말 할 수 없다. 아무튼 나는 그 얼마 후 치렀던 언론사 입사시험에서 떨어졌다. 그 여파는 컸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김 대위가 나에게 사준 책에 남긴 글과 사인. 1976년 9월 가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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