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들처럼 흥도 있고 신명도 있다. 그런데 나의 흥과 신명은 평심 상태로는 나오질 않고 오로지 술의 힘을 빌려야 그나마 빼족이 나오는 것이라는 걸 이번 마산길에 절실히 알았다. 고향 마산서 오랜 만에 모인 선후배들이니 술 한잔 후 노래방이 빠질 수가 없다. 선후배 면면들은 다들 그런대로 좀 근엄하달까, 그렇게 나대지를 않는 분들이다. 그런데 노래방 가자는데는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열상으로 아래인 한석정 후배가 제일 적극적이었다. 술을 마시질 않은 나는 마음 속으로 나름 준비를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창동에 있는 '프라자'라는 노래방은 좋은 곳이었다. 음향시설도 좋았고 분위기도 그랬다. 거기는 김차열 등 1960, 70년대 마산상고 야구의 전성기 에이스로 활약했던 분들의 일종의 아지트라 했다. 우리가 거기로 간 것도 그들 중 한 분을 만나기 위한 것이다. 노래방에는 이미 그 분들의 노래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다들 잘 부르셨다. 80대에 접어든 나이의 목소리라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을 만큼 노래들이 빼어났다.
우리 일행의 노래는 석정 후배가 먼저 시작했다. 노래방에 오기전 후배는 지나가는 말로 노래에 대한 ‘열정’을 피력했고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후배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예전 가회동 하숙시절 후배는 우리 가곡 중 의미있는 것들을 걸죽한 목소리로 곧잘 불렀다. 이를테면 파인 김동환의 ’강이 풀리면‘이나 신동엽의 ‘산에 강산에‘ 등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저으기 걱정이 됐다. 노래방에서 가곡 부르기가 좀 어정쩡할 것인데…
그런데 후배는 그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곡 뿐 아니라 유행가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것이다. (사연이 깃든) 노래는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듯 불러야 한다는 것 운운. 나로서는 후배의 그 말이 뭘 얘기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후배의 절창에 가까운 노래들을 듣고서야 알았다. 후배 노래 속에 살아온 지난 시절의 역경과 절망, 슬픔, 한, 희망 등이 혼재해있는 것 같았다. 후배가 그렇게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고 들은 것인데, 한마디로 후배는 노래를 잘 불렀고 선곡도 좋았다. 후배를 통해 나는 윤수일의 ‘터미널’이라는 노래를 처음 알았는데, 곡과 가사를 모르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따라 불렀고 박수로 장단을 맞췄다.
나도 노래 한 곡을 신청해놓았던 터라 나가 불렀다. 나름 18번으로 여기고 지금까지 어디서나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듣던 ‘영등포의 밤.’ 그런데 정말이지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듣기에 너무 못 불렀다. 중간에 그만 두고 들어올 생각이 들 만큼 엉망이었다. 노래를 부르는데, 흥과 신명이 도저히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에게 흥과 신명이라는 것은 술에서 기반한다는 걸 절감했다는 얘기다.
석태 형은 흘러간 노래들을 불렀다. 남인수의 ‘낙화유수’도 불렀고, 안다성의 ‘에레나가 된 순이’ 등도 불렀다. 이화자의 ‘화류춘몽’은 왜 빠뜨렸는지 모르겠다. 제일 선배인 김종수 형의 노래를 나는 처음 들었다. CEO다운 젊잔함도 노래 앞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는 굵직한 저음으로 정말 잘 불렀다. 송인성 선배는 노래를 하질 않았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술을 많이 마신 탓이었지 아닌가 싶다. 나는 마산 1박2일 동안 소맥 두 잔만 마셨다.
#창동프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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