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 혹은 고진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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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고봉선, 혹은 고진숙 선생님

by stingo 2025. 2. 24.

중학교 때 음악을 가르쳐 주신 분은 고봉선 선생님이었다. 1966년 까까머리로 입학했을 때 만난 선생님이다. 고 선생님은 음악을 담담했지만, 수업시간에는 종종 음악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한시다. 흑판에 우리들은 이해를 못하는 한시를 길게 쓰시고는 뭐라뭐라 하시는데, 이해를 잘 못하는 우리들은 그저 눈만 멀뚱히 뜬 채 보고 듣고있을 뿐이었다. 한가지 지금껏 기억에 남는 건, 나중에 안 말로 일필휘지, 바로 그것으로 어린 마음에도 휘날려 쓴 글씨가 아주 좋았다.

선생님은 시인으로, 필명은 고진숙이었다. ‘와사등’의 김광균 시인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당시 촉망받던 시인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시집을 한권 내셨고, 우리들은 모두들 그 시집을 200원 씩에 한권 씩 사서 읽었다. 시집 이름이 아직 기억에 있다. <꿈에서 깬 내 이야기>가 그 시집 타이틀이다. 이 시집을 검색을 해보니 나온다. 시집 표지가 연분홍색이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 그랬다. 오늘에사 다시 보니 시집의 서문을 문덕수 선생이 썼다. 나는 그 서문을 보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중학교 때 문덕수 선생이 쓴 책으로 <현대문장작법>이라는, 글을 쓰는데 있어 입문서 격인 책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다. 글쓰는 맛과 멋, 그리고 방법을 나에게 처음 알게해준 게 바로 그 책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마산중학교에 계시면서 음악과 문학을 넘나들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선생님이 그런 활동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도시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 가곡의 노랫말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게 조두남 작곡의 ‘그리움’이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가곡들 중의 하나인 ‘그리움’을 우리들은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워 많이 불렀다. ‘그리움’의 노랫말은 제목 그대로 어떤 이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2007년인가 중학교 졸업 40주년 행사를 위해 동기들과 마산으로 내려가는 버스에 선생님을 모셨다. 마침 내 옆자리에 선생님이 앉으셨다. 그때 나는 ‘그리움‘의 그 대상이 누군지를 물었다. 나는 속으로 이루지 못한 어떤 애틋한 사랑의 대상일 것이라는 추측을 미리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그리움’ 노랫말의 그 사람은 바로 공장 여직공이었던 것이다. 6.25전쟁의 와중에 부산 피난지에 만났던 앳된 여직공이었던 것인데, 선생님은 아마 그 여직공에 연민의 감정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아, 나는 좀 짓궂게 계속 그런 방향 쪽으로 물었지만 선생님이 얼버무려셨던 기억이있다.

선생님은 우리 마산중학교 우리 16회 동기들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수업 방식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독특한 성격 탓이다. 선생님은 성질이 급한 분이었다. 말하자면 다혈질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나는 그런 성격이 천재는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머리가 좋은 분들의 특성 중의 하나로 보고있는데, 내 생각에 선생님이 그랬다. 선생님에 관해 우리 동기들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들도 선생님의 그런 성격에 기인한 게  많다.

그 중 하나로 선생님이 가끔 다혈질적인 기질로 매질을 하실 때 맞는 대상이 모두 키가 작은 급우들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불같이 타올랐다가 급격히 꺼지는 그런 성격의 ‘희생자’로 키 작은 급우였던 것이다. 선생님 매질의 한 수단은 오르간이기도 했다. 음악시간에 오르간에 앉아 가르치다가 성격이 발동하면 부지불식 간에 오르간을 발로 차듯 밀어 버린다. 그러면 맨 앞줄에 앉은 키작은 급우들의 가슴 부위를 오르간이 덮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은 비호처럼 일어나 손이든 출석부든 뭐고를 가리질 않고 때려 나가는데, 맨 앞에 앉은 앞줄 급우들이 그 대상이다. 가끔 그 뒷줄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대개 앞줄에서 끝나고 뒤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때 제일 많이 ‘당한’ 급우는, 키가 학년을 통털어 제일 작았던 노치군이라는 친구인데, 지금도 만나 중학교 시절 얘기를 하면 이 얘기를 꺼내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중 운운으로 농담을 하기도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생님과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 그후 선생님의 거취에 관해 알고있는 동기들은 드물었다. 2007년 졸업 40주년 때 서울에 계셨던 선생님의 거처를 알고 우리들은 선생님을 초대했는데, 아마 그때가 졸업 후 처음 선생님과 재회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 후 SNS를 통해 선생님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페이스북에 선생님이 활동하고 계신것이었는데, 그때가 아마 2010년을 전후한 때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드물지만 내가 포스팅한 글에 공감을 주기도 하셨는데, 지금 90줄 나이에 접어든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때 잘 챙겨드리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런 고봉선 선생님을 어제 다시 만나게 됐다. 직접 대면해 만난 것은 아니고 좀 희한한 경우로 접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의 아드님을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만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어떤 분이 마산 추산동에 있는 3.15기념탑 앞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옛 사진을 올렸다. 3.15기념탑이 나와있는 그 사진을 보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분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몇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분이 고봉선 선생님의 자제분이라는 걸 알게됐던 것이다. 먼저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금 노환으로 분당 자택에 누워 계시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마산중학교 때 은사분들은 확인은 안 해봤지만 지금쯤 이 세상에 안 계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제자들 나이가 70대 중반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나이의 한계 때문이다. 중학교 은사 선생님들 가운데 그래도 고봉선 선생님이 편찮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다는 게 뭐랄까,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석 류>
누구를 보고파
창을 열면
석류가 그리운 모습으로 있다가
나를 보고 붉게
웃음 짓는다
입을 열어 미소한다.
내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석류는 스스로 꼭지를 따고
나에게 안겨 왔다.







#고봉선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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