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후두둑 거렸다. 돈강에서는 벌써 땅거미 들 때 연속되는 자지러진 소리를 내면서 얼음이 우적거리더니… 희퍼리스레한 하늘을 해가 헤엄쳐 가고… 별이 아니라 파라스름 하면서도 노란 빛깔의 올찬, 알지 못할 열매가 잎사귀 줄기에 달려있는 것 같이 뵈었다.”
러시아 문호 미하일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에 나오는 대목이다. 러시아어로 된 원문은 읽어보지 못해 모르겠으나, 소설 속 돈강의 분위기를 이토록 생동감 있는 감각으로 표현해낸 번역문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봐도 어디 한 구석 후지고 어색한 데가 느껴지지 않는 글 아닌가.
바로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백석(1912~1996)이 번역한 글이다. 백석은 탁월한 시어, 특히 맛깔스런 토속어를 구사하는 어휘와 주제의 독창성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인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 중의 시인’으로 꼽혀지고 있는 게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다 백석이 이처럼 탁월한 번역가로서의 재능과 풍모를 지니고 있는 게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시인 백석과 더불어 번역가로서의 백석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번역가 백석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의 번역본 40여 권에 관한 자료가 새롭게 소개된 건 지난 2012년이다. 백석 자료 수집가이자 자유기고가인 ‘송 준’이란 분이 자신의 필생의 역저인 『시인 백석』을 출간, 그 속에 수록된 번역 권 등 백석 관련 자료를 백석 탄생 100주년에 맞춰 공개한 것이다. 전 4권으로 된 이 책에는 그동안 제목만 전해지고 실물을 찾지 못했던 백석의 번역서인 『테스』, 『희랍신화』, 『체호프』, 『푸시킨 詩선집』 등 40여 권의 번역 단행본에 관한 자료도 공개됨으로써 양과 질에 있어 백석 번역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국문학)에 따르면 지금껏 알려지기로 백석은 소설의 경우 1940년 『테스』를 시작으로 1956년까지 장편 4편과 단편집 1권, 중편 동화집 1권, 단편 2편 분량을 번역했다. 이와 함께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사실상 시 번역에만 몰두, 확인된 것만 현대시 197편과 동화시 11편 등 모두 208편에 이른다. 방대한 양이다. 2012년 공개된 백석 번역서 목록에 이런 내용과 함께 번역 작품이 구체적으로 소상하게 포함돼 있어 작품과 자료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데, 당시 이들 번역서가 단계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했는데, 그 뒷소식이 궁금하다.
백석이 시인이면서 한편으로 번역에 집중한 이유가 무엇일까. 백석은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에 남았다. 고향(평북 정주)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는 천재시인인 그에게 사상성이 강조되는 詩作을 강요했을 것이다. 그것을 회피하는 수단으로서의 次善이 번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김일성 체제 미화의 제물로 그의 시가 동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별로 상관없는 번역작업에 몰두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다는 얘기다.
“…엄마 목소리는 너무도 가늘어. 엄마, 나한테는 먹을 것 말고, 아이보개 시중꾼을 구해다 줘!” 백석이 번역한 러시아 동화작가 마르샤크의『철없는 새끼 쥐의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먹을 것 말고, 시중꾼을 달라’는 구절에서, 북한 체제의 냉대 속에 양강도 개마고원지대 벽촌인 삼수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농사와 양을 치며 살다 생을 마감한 백석의 외로움과 답답함이 묻어난다.
'sapiens(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의 '유머' (3) | 2020.07.30 |
---|---|
밥 딜런(Bob Dylan) 가라사대... (1) | 2020.07.30 |
어머니의 '나이' (6) | 2020.07.14 |
Sophie Zawistowski (0) | 2020.07.05 |
茶山 정약용과 與猶堂 (6) | 2020.07.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