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춘의 흘러간 노래 ‘雨中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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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춘의 흘러간 노래 ‘雨中의 여인’

by stingo 2020. 8. 17.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니까 1960년대 중후반 쯤 되겠다. 집이 이사를 했다. 마산 자산동이다. 우리 집은 마산중학으로 올라가는 사거리 길목에 있었는데 꽤 컸다. 이사를 가니 그 동네 아이들의 텃세가 심했다. 같이 놀아도 집단으로 왕따를 놓는 게 역력했다. 그 중에 덩치가 제일 큰 아이 이름이 학춘이었다. 그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환심을 사기위한 고육책이다. 친해졌다. 제일 덩치 크고 쌈 잘 하는 학춘이하고 가까워지면서 그 동네에서 살고 놀기에 편해졌다.


학춘이 집은 골목에 있었는데, 그 집 아들이 자랑거리였다. 물론 학춘이는 아니다. 그 형이 공부 잘 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원래 없는 집은 자식들에 대한 상대적 차별이 심하다. 형이 공부를 잘 하니까 학춘이는 공부를 하든 말든 내 팽개쳐진 천덕꾸러기였다. 중학교도 잘 다녔나 모르겠다. 학춘이가 아마 나보다 나이는 두어 살 위였을 것이다. 조숙했고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았다. 학춘이는 큰 덩치에 어울리게 목소리가 굵고 우렁찼다. 용모도 꽤 괜찮았다. 나는 그 때 학춘이가 그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에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1970년 여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때 어떤 노래 하나가 바람을 탔다. 제목은 모르겠고 “그대가 날 버렸나 내가…”로 시작하던 유행가다. 어느 다방을 나오는데 마침 그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판 틀어주는 부스 곁을 지나는데 레코드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재킷에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사진이 있었는데, 어딘가 면이 많이 익었다. 부스에 들어가 재킷을 봤더니, 학춘이의 얼굴이었다. 학춘이가 기어코 대중가수가 됐고, 그 노래 하나로 뜬 것이다. 참 신기했다. 그 때서야 학춘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는 기억이 떠 올랐다. 무학국민학교에서 가끔 가요콩쿨대회가 열렸다. 학춘이가 그 노래자랑에 나간 적이 있다. 오기택이가 부른 ‘우중의 여인’이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학춘이가 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아주 허스키한 저음으로. 그 때 학춘이가 상을 탔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유튜브 서핑을 하며 어찌어찌하다가 학춘이가 부른 노래를 발견했다. ‘우중의 여인’이다. 학춘이의 한창 시절 사진이 재킷에 박혀있는 양판 사진도 있다. 들어 보았다. 역시 저음의 굵직한 목청이 좋다. 그런데 가사가 좀 다르다. 이 노래는 나도 좋아해서 가사는 잘 안다. 1절 가사가 지금 불려지는 ‘우중의 노래’와 달랐다. 2절은 같았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학춘이는 이 노래를 분명 리바이블해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가사가 다르다? 이런 추측을 해 본다. 학춘이가 부른 이 노래는 오리지널이었을 것이다. 학춘이가 오리지널 ‘우중의 여인’을 부른 것은, 기존에 나와있던 ‘우중의 노래’와 어떤 차별성을 노리고 취입한 게 아니었을까.

 

학춘이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학춘이도 잘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후속곡이 신통찮았던 것 같다. 원래 연예계라는 곳이 그렇다. 반짝하던 것이 이어져야 한다. 그게 신통찮으면 몸과 처세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엄혹한 자기관리도 필요하다. 학춘이는 그랬지 못한 것 같다. 1970년대 초반, 방학을 맞아 마산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학춘이와 조우를 했다. 나와는 완전히 딴 판의 모습이었다. 화려한 정장 차림에 화장까지 한 얼굴이다. 나를 알아보고는 껴 안는다. 가자. 우리 식당차에 가서 맥주 한 잔 하자. 학춘이는 좀 취해 있었다. 식당차엘 갔더니 묘령의 아리따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날 식당차에서 학춘이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게 학춘이하고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학춘이 노래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학춘이도 멀어져 갔다.

 

마산 월남다리 아래에 청국장 잘 하는 식당이 있다. 작년에 취재 차 내려갔다가 선배와 같이 그 집엘 들렀다. 막걸리를 마시며 선배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 때 취재 중이던 어떤 주제에 얘기가 미치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다가와 슬며시 말을 건넨다. 지금 이학춘이 이야기 합니꺼? 그 때 마산의 옛 가수에 대한 글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그 주인 아저씨로부터 학춘이의 얘기를 들었다. 내가 그 때,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 봤다면 그게 아마 학춘이의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만난 후 얼마되지 않아 학춘이는 세상을 뜬 것이다.

 

내가 쓴 글에 학춘이가 조금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청국장 집 주인 아저씨가 그날 들려 준 말이 곧 내가 내린 학춘이의 결론이다. 주인 아저씨의 이런 말이 귀에 남아있다. 저거 형 잘 알지예? 그 어느 나라 대사도 하고 한 때 잘 나갔지예… 그 내용을 학춘이 글에다 굳이 끼우고 싶지 않았다. 대사와 딴따라 대중가수. 어울리지 않는 조합 아닌가.

학춘이의 ‘우중의 여인’을 다시 들어 본다. 사진으로 그의 모습을 본다. 40년도 지난 세월이다. 학춘이는 20대 꿈 많은 청년의 모습이다. 노래로나마 남아있다는 게 어찌보면 반갑다, 또 어찌보면 두렵다. 사람이 그렇고 노래가 그렇고 세월이 그렇다.

 

 

 

 

 

이학춘의 노래 중 가장 크게 히트한 곡은 '괴로워도 웃으며'다. 그 노래가 담겨진 LP 판의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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