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생각지도 않던 중에 걸려든 일이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저지르고 나서 생각하자. 이런 쪽으로 마음이 가기는 간다. 따져볼 게 있느냐. 네 나이에 그런 일이라면 고맙다하고 받아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뭔가 기시감 같은 게 느껴져 꺼림직스럽기도 하다.
8년 전 때도 일단 저지르고 보았다. 그러고는 방황을 좀 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다고나 할까. 그 시기에 본 영화가, 코엔 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이다. 지금 이런 상황과 처지에서 그 때 본 영화와 당시의 소회를 다시 떠 올려 본다. 지금 내가 취해야 할 결정에 도움이 될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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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동떨어진 내용의 영화가 더러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이 영화도 -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는 - 그 중의 하나였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제목으로서 느껴지는 어떤 동병상련 때문에 영화를 봤는데, 보면서도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내가 뭘 봤는지 모를 정도로 내용이 제목과는 상관이 없는 영화였다. 그러나 보고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노인'이 그 때 슬그머니 나타난 것이다.
영화는 검은 돈 200만불을 놓고 벌이는 죽음의 향연이 메인 스토리다. 그 가운데 등장하는, 토미 리 존스가 분한 늙은 보안관 에드는 살인자가 있으니 반드시 따라붙어야 하는 역할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저 들러리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캐릭터이다. 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는 하고싶은 메시지를 기실이 노인 보안관을 통해 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보안관은 늙었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노인 보안관은 살아온 만큼의 순리를 내세우고 그 순리를 따르며 산다. 그러나 살륙현장을 접하며 살인자를 쫓는 늙은 보안관의 삶은 더 이상 순리적인 게 아니다. 이유없이 사람을 죽인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기계처럼 죽이는 살인자. 에드는 그래서 더 힘들고 말도 안되는 상황 속을 서성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 속 그의 피곤한 표정에서 그런 독백이 읽혀진다.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어쩌다 다시 일을 잡고 출근한지 좀 된다.
입사하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이도 그렇고 직책도 그렇고. 이런 저런 과정, 그리고 또 어떻게 어떻게 조정을 해서 어정쩡한 타이틀을 꿰찼다. 어쨌든 의욕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고 나름대로의 결심도 다졌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그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내가 할 일은 많다. 평생을 해 온 일이 그 짓이고 보니 숙련도나 능률도 높았다. 처음에는 그런 호평들이 주변에서 나왔다. 할만했고 살만했다. 그저 그만큼만 하면 되리라는 안착감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도 스스로 초조해져 가는 자신을 느낀다. 오로지 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나를 조직 시스템의 일원, 말하자면 직원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나이 많이 먹은 '일꾼' 정도로 여길 뿐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오로지 '일'이다. 그들은 나를 '일'로 여길 뿐이다. 일이 없고, 일을 못하면 나는 퇴출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하루 하루를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으로 보낸다. 주변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 해서 슬금슬금 눈치도 본다. 높은 사람에게는 마음에 없는 아양도 떨고. 다른 직원들과도 교류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그런다고 별로 통하지도 않는다. 자포자기가 약이다. 젊은 그들과 할 얘기가 뭐가 있겠는가. 불과 몇년 전만하더라도 나는 이러지 않았다. 웬간한 것은 일과 술로 받아치고 넘겼다. 나름대로 순리를 앞세운 논리가 있었다. 지금 그 논리를 내세웠다간 미친 놈 소릴 들을 것이 뻔하다. 알콜중독자라는 부수적인 별칭과 함께.
상황이 이러니 처지가 말이 아니다. 주눅들린 몰골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불만과 스트레스를 혼자서 녹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도 늙었고, 영화 속 보안관 에드처럼 노인의 처지로 시간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를 다시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도 그런 발버둥의 일환일 수도 있다. 그 게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부여 안고서. (20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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