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군대 보내고 마음 좋은 부모 없습니다. 어떡하든 좋은 데 보내고 싶고, 안전한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청탁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추미애도 엄마 마음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인 것을, 그러지 않고있는 것을 보니 아무튼 참 고약하고 드세고 못된 여자인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처세, 언행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런 고집스러움과 오만함으로 온 나라가 추, 秋, 醜의 '추 칠갑'으로 도배질되고 있습니다.
군대를 간 처지들에서는 아마 대개들 청탁의 유혹이나 그 '맛'에서 자유스럽지 못할 겁니다. 당사자도 그렇고 부모들도 그럴 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관한 옛 기억을 소환해 봅니다.
1. 논산에서 배치받아 하루 밤을 뱅뱅 돌아 도착한 곳이 경기도 파주 1사단 보충대였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피둥피둥 살이 오른 상병 하나가 보충대에 와서는 글 좀 쓰는 사람 손들어라 했습니다. 손 들었습니다. 그리고 뽑혔습니다. 사단사령부 G-1, 그러니까 인사처였습니다.
사무실도 그렇고 내무반이나 급식 이런 게 좋았습니다. 이틀 쯤 지나니까, 그 상병이 불렀습니다. 돈 가진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왜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내가 맘에 든다며 인사처에 계속 근무하게 해 주겠다. 그럴려면 인사계에게 돈으로 청탁을 넣어야 한다면서 그걸 자기가 대신 해 주겠다는 것이었지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군대까지 와 돈까지 써가며 일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973년 3월 입대를 위해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2만원을 줬습니다. 그 돈은 그 때까지 내 팬티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거절하니까 바로 즉시 보충대로 다시 내려갔고, 그 이튿날 후송귀대병들의 트럭을 타고 임진강의 리비교를 건넜습니다. 다들 나보고 병신이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후회스런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2. 임진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15연대였습니다. 그곳 보충대에서 또 그런 청탁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목공소 근무 병장이었는데, 액수까지 제시하면서 2만원만 쓰면 연대본부에 근무케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또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1대대로 보내고 다시 3중대로 배치받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개성 바로 앞에 있는 송악OP입니다. OP에 중대본부가 있어 신고를 하면서 알았는데, 중대장이 진해 분이었습니다. 중대장이 내 인사카드를 본 모양입니다. 통신병 보직을 맡았습니다. OP에서 개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한 푼 안 쓰니 결국 최전방 이곳 송악OP에 떨어지는구나 하는...
송악OP에서 근무한지 한 3개월 쯤 됐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왔습니다. '자유의 다리'로 나가 어머니와 상봉을 했습니다. 외박증을 끊어주길래 문산으로 나와 방을 잡았는데, 어머니는 처음 내 모습을 본 후부터 당신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로 나를 자유의 다리에서 봤을 때 어머니는 새까맣게 그을린데다 퉁퉁 부어있는내 모습에 "아 쟤는 내 아들이 아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여코 문산에서 택시를 대절해 서울 정릉의 먼 친척되는 아저씨를 찾아갔습니다. 그 아저씨는 당시 상당한 지위의 공무원이었습니다. 그 아저씨를 붙들고 어머니는 내 아들을 살려내라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면회를 한 후 얼마 쯤 지났는데, 중대본부 유선전화로 어떤 분이 전화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군대생활이 어떻냐, 정말 못 견디겠느냐 등등.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닙니다. 견딜 만합니다. 기억이 좀 흐릿하지만 그 얼마 후 아저씨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은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답장을 드렸습니다. 군대생활 잘 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기억에 또렷한 한 대목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남아로 태어나 분단된 산하의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지금, 그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답장을 보낸 후 1973년 9월 쯤 저에게 갑자기 사단보충대로 전출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속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저씨가 힘을 써 그렇게 된 줄로 생각했습니다.
나의 급작스런 전출은 후에 이래저래 진실찾기 양상이 된 측면이 있습니다. 내 부모님은 그 아저씨가 힘을 써줬기 때문이라며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아저씨가 저로서도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 후 아저씨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근데 아저씨는 무슨 말이냐며 반문했습니다. 재 전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편지에 적은 나의 뜻을 존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라도 전출 문제에 일절 관여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전방 소총중대에서 강건너 사단사령부로 전출해 온 그 얘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사실 DMZ에서 강건너 FEBA 지역으로의 전출은 결코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좀 우습지만, 출신 고등학교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280 주특기는 소총중대 편성이 아닌, 사단 편제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주특기 보유자가 너무 많아 소총중대로까지 배치됐는데, 그런 가운데 사단에서 1명이 필요했습니다. 예하 3개 연대 280 주특기 보유자 가운데 단 1명만 뽑히는 것이었는데, 제가 선택됐던 것이지요.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가 속한 15연대 인사병이 연대 내 280 주특기를 가진 인사카드를 뽑아 모았습니다. 그 카드 가운데 연대 인사병이 제 것을 뽑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전출명령에 따라 임진강을 건너 사단사령부까지 호송을 해 주면서 그 인사병이 대략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 여명의 인사카드 중에 당신이 눈에 띄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M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그 인사병은 당시 제가 나온 학교와 이런저런 경쟁관계에 있던 J 고교 출신이었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군대에서 보게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사단에 올렸습니다.
사단에 올린다고 뽑히는 건 아닙니다. 여타 다른 2개 연대에서 올라온 선발자와 경합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단 심사과정에 제가 뽑힌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사단 사령부로 전출을 오면서 주변에서 저더러 "억수로 재수가 좋은 놈"이라는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단사령부로 전출 오게 된 배경에는 출신 고등학교와 함께 연대 인사계 인사병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인사병은 그 이름이 특출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박평양 상병이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만, 찾아지지가 않습디다. 지금이라도 한번 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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