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마음에서였던지 집에 굴러다니는 성경책을 찾아보다 생경스러운 한 권을 발견했다. 붉은 가죽 커버의, 꽤 품위있게 보이는 성경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성경책이 아니다. 그러니까 독어, 불어, 영어판으로 된 성경책이다. 마침 원어성경에 관심을 두고있던 터라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위 3개국 언어로 된 신약 번역판이다. 어디서 나왔는지 살펴보니 ‘제네바성경연구소(Geneve Bible Society)‘에서 1981년에 펴낸 것으로 나와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다 이런 외국어 성경책을 갖게 됐을까고 생각하다 그 실마리를 찾았다. 표지아래에 출판사 이름 대신 뭐라 적혀있는데, 그게 ’Hotel’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성경책이 어떤 용도의 것인가가 짐작이 갔다. 호텔룸에 비치된 성경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어떤 호텔에서 이 성경책을 가져온 것이 되는 것 아닌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 가만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성경책이 독일어를 중심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분명 독일 어떤 도시의 호텔에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은 예전에 몇 번 갔었다. 본,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그 중 한 도시의 호텔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성경책과 관련한 어떤 기억은 없다. 그저 호텔방에서 이런 저런 걸 보다 이 성경책을 뒤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다 그냥 갖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말이 갖고 온 것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훔쳐 온 것이 맞는 말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 하는 자책감이 일었다. 이 성격책의 첫 머리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호텔방에서 이 책을 갖고 가지마라(please do not remove this book from the hotel room)’.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들고 가져왔으니 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절도를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수치감, 죄책감에 얼굴이 달아 오른다.
뭔가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원상회복’을 시키는 게 제일 타당한 방법일 것인데, 이십 수년이 지난 지금 그 호텔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성경책을 훔치는 게 과연 죄가 될 것인가 하는 것. 마침 어디를 뒤져보니 독일 격언에 이런게 나온다. “경전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경우와 흡사한데, 촛대로 불을 밝혀 성경을 열심히 읽어 감화된다면, 그 것으로 죄가 안 된다는 것인가.
나는 촛대가 아닌 성경을 훔쳤기에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 한 곳이 껄끄럼하다. 어쨌든 나는 이 성경책을 어떤 방법으로 원상회복 시킬지에 대한 궁리를 계속할 것 같다. 그러면서 그러는 동안이라도 열심히 이 성경책을 읽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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