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京馬山學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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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an(馬山)

'在京馬山學友會'

by stingo 2020. 10. 11.

 

재경마산학우회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 모임은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마산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단체로, 그 연원은 꽤 오래됐으니 역사성은 있다. 1957년 '마산문화협의회'에서 펴낸 '마산문화연감'에 따르면 재경마산학우회는 1952년 결성됐다. 초대회장은 마산고 8회 졸업생인 박후식이, 2대 회장으로는 현 동서식품의 이홍희 회장이, 그리고 3대 회장은 마산상고 출신의 박수복이 맡았는데, 이홍희는 재경마산학우회 결성 당시 회칙과 조항을 만들었다. "悠悠한 天壤과 遙遙한 古今의 眞理를 探究하여 諸先輩가 築造한 偉大한 勳業을 繼承發展시키고져..."고 시작되는 회칙 전문은 아직도 회자되는 명문으로 전해진다.

 

초창기 학우회의 활동과 관련해서 '마산문화연감'은 1955년 8월에 '문학강좌'를, 그리고 9월에는 '자작시평회'를 개최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옛 자료에 따르면 1957년 8월 신마산 제일극장에서 ‘시민위안의 밤’이 열렸는데, 이를 학우회가 주최했다는 짤막한 글이 하나 나온다. 이후 학우회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홍희 회장에 따르면, 패기있게 결성된 학우회는 1950년대 후반까지는 그런대로 활동을 지속해 나갔으나, 그후 경비난 등 제반 사정으로 그 활동이 위축됐다는 것이다.

 

이후 재경마산학우회가 다시 부각돼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1965년이니, 아마도 그 전에는 학우회가 있기는 있으되 유명무실한 상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 무렵 다시 재결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1975년 2월에 나온 학우회지 ‘남도’ 창간호에 따르면, 1965년 11월30일 재결성을 위한 창립총회가 열려 회장에 조남규(전 한나라당 경남지부 사무처장)가 선임됐다고 나오는데, 이 때를 기준으로 학우회 기수가 다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학우회가 다시 결성된 것은 아마도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대학생들의 역할이 요구되던 시기와 맞물려진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 정치체제 아래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춘을 떠나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있을 때다. 먹고살기 힘든 때였으니 대학진학률도 높지 않아 대학생들이 ‘대접’ 받을 때고, 대학생들은 자연히 자부심이 강했던 시기다. 그런 만큼 대학생들 스스로도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사회를 계몽해야한다는 의식들이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전국 각 지역마다 재경학우회가 생겨나는 추세 속에 마산도 포함된 것이다.

 

이 때 재결성된 마산학우회는 1975년 11대 집행부까지 이어져 왔는데, 그 이후 기수에 관한 기록은 좀 불투명하다. 학우회지 ‘남도’의 경우 창간호를 포함해 4호까지만 전해온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시점에서 학우회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한다.

 

아무튼 11기까지 이어진 재경마산학우회의 활동과 성격을 놓고 보면 확연하게 갈리는 부분이 있다. 조남규 회장의 1기부터 오창환 회장의 9기까지가 재경 마산 대학생들의 선. 후배간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애항심을 바탕으로 고향의 발전을 위한다는 취지로 활동을 한 것이라면, 그 이후인 1974년 한철수 회장의 11기부터는 물론 친목과 고향발전이라는 전제는 깔고 있지만, 이와 함께 유신체제하의 그 무렵 군사독재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구심점으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선 학생운동의 흐름을 탄 이념적인 색체가 짙어지고 있는 특색을 갖는다. 말하자면 그 때를 기점으로 학우회가 진보적인 성격으로 개편됐다는 얘기다.

 

10대 집행부는 이에 따라 이전의 학우회 활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집행부 결성과 함께 제일 처음 시도한 게 학우회지인 ‘남도’를 재발간한 일이다. 이를 위해 별도로 5명의 편집위원회(편집장 박진해)를 구성했는데, 이들은 이 회지가 “이 고장(마산) 젊은 지성의 대변지가 될 것임을 자부한다”고 편집후기에서 밝히고 있듯, 회지를 통해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과 노동자. 농민 등 소외계층의 실상과 소개하는 등 사회성이 짙은 진보적 이념색체 담은 글을 게재한다.

 

재경마산학우회지 '남도' 창간호(이광석 소장)

 

이 회지에는 서울대생이었던 서익진의 “경제적 측면에서 본 후진국 민주주의‘ 등 두 편의 논문과 연세대생이었던 박진해의 ’3.15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칼럼,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열악한 근로조건 등 문제점을 지적한 글 등이 실려 있다. 이 회지는 후에 이들 10기 집행부가 주축이 돼 발간한 무크지 ‘마산문화’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기 집행부에 이은 11기 1975년의 집행부는 서익진이 회장이 되면서 그 색체가 더 강했다. 그해 8.15 광복절을 맞아 ‘일제 식민지사관의 비판과 그 극복’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고, 76년 1월에는 연세대 한태동 박사를 초청, “민족문화 창조를 향한 새 가치관 모색‘을 주제로 학술강연회를 개최한다.

 

이 학술강연회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77년에는 고려대 강만길 교수, 78년에는 한완상 당시 해직교수를 초청해 ’청년과 청년문화‘라는 강연회를 가졌다. 당시 이 모임을 중심으로 별도의 소모임을 가지기도 했는데, 주요 멤버로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돼 군에 징집됐던 주대환(서울대)과 역시 군에 징집됐던 황성권(한국외대) 등이 있었다.

 

이 소모임은 학술강연을 중심으로 연극. 탈춤의 문화운동, 진보서적 일기의 양서조합운동으로 맥을 이어가면서 한석태 당시 경남대교수를 중심으로 경남대 최초의 이념동아리였던 ’사회과학연구회‘를 낳았고, 이 같은 운동의 자양분이 궁극적으로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보기에 이념으로 경도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재경마산학우회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11기 집행부 이후 학우회 활동이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시들해진 것에 그런 시각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진단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라는 생각이다. 글 모두에서 지금도 학우회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한 것은 11기 이후 학우회와 관련한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해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재경마산학우회의 역대 활동 중에 또 다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애향심을 담은 지역에서의 문화와 학술활동이다. 1950년대 중반, 학우회가 태동되던 시기부터 이 활동은 학우회의 메인 이벤트였다. 재결성된 1965년부터의 학우회 활동도 그랬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학우제’가 개최되는데, 1회는 1967년 2월5일부터 일주일 간 열렸다.

 

당시 학우제는 초청학술강연회를 비롯해 음악회, 미술전, 시화전, 연극회, 그리고 체육대회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져 마산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학우제의 전성기는 1971년 이감열 회장의 6대 집행부 때가 아닌가 싶다. 1971년 2월3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6회 학우제에는 학생들 뿐 아니라 수백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룬다. 문학의 밤과 음악회, 연극회, 그리고 ‘우리가 보는 한국사회’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1971년 2월 3일 재경마산학우회 '문학의 밤'을 끝낸 후 찍은 집행부(앞 줄 왼쪽에서 세번 째가 당시 이감열 회장)

 

한 겨울밤 한성예식장에서 열렸던 문학의 밤은 대성황 속에 이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행사에 나는 음향을 맡았다.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다니던 이상철 시인의 절규에 가까운 시낭송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주 한잔을 걸친 상태에서 자작시를 울부짖듯 낭송한 것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던 한석태의 장진주사(將進酒辭) 해석과 낭송은 백미였다.

 

“군불견(君不見)/황하지수천상래(黃河之水天上來)/분류도해불복회(奔流到海不復廻) 그대, 알지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도하게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주은래를 닮은, 특히 짙은 눈썹이 속 뺀 한석태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는 청중들의 넋을 사로잡고 있었다. 여기에 해석이 일품이었다. 장진주사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서 여기에 현대적인 관점으로 글을 재창조한 것인데, 그 후로도 그런 해석으로 장진주사를 읊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지역신문의 학우회를 상대로 한 필화사건도 학우회 활동과 관련해 빼 놓을 수 없는 대목이고 추억이다. 당시 행사를 위해 모이던 곳은 다방 밖에 없었다. 남성도 대광예식장 지하의 ‘미라보다방’이 집행부가 모이던 곳이다. 아마도 남. 여 학생들이 매일 모여 죽치고 앉았는 게 꼴사나워 보였던 모양이다. 지역신문의 어떤 논설위원이 “남녀학생들이 매일 하는 일 없이 모여앉아 노닥거리고...” 운운의, 이를 꼬집는 칼럼을 쓴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논설위원은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친 은사로 익히 잘 알고 있던 분이다. 모두들 발끈했다. 집행부는 결국 신문사와 그 논설위원의 중성동 자택을 항의방문하기도 했다. 그 며칠 후 그 신문에 학우회 집행부의 입장이 반영된 사과형식의 칼럼이 게재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후 윤창득 회장의 8대 집행부부터 학우제 행사의 색체가 좀 달라진다. 학술과 문화라는 기존의 행사기조는 유지됐지만, 이에 예능적인 요소가 더 해진 특색을 갖는데, 아마도 그 당시 유행하던 통기타와 청바지문화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무렵 서울서 인기가 높던 포크송 가수를 초청해 공연을 가지기도 했는데, ‘현경과 은혜’ 이은실 등이 그 때 처음 마산으로 와서 경남대 강당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1974년 지금은 고인이 된 오창환 회장의 9회 집행부 때도 그랬다. 당시 창원의 39사단에 군종사병으로 있던, 후에 ‘너’를 불러 유명한 이종용이 처음 학우회 행사에 그 모습을 나타내던 시기인데, 그 해 1월의 8회 학우제 때는 윤형주, 김세환, 양희등을 초청해 공연을 가진다. 양희은 대신 어니언스가 온 이 때 공연의 사회를 맡은 사람이 바로 강삼재 전 의원이다.

 

1974년 오창환 회장의 9기에 이어 등장한 게 앞서 언급한 한철수 회장의 10기로,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념체제로 학우회가 개편된 게 이 때부터다. 이런 체제로 개편된 되는 학우회 활동이 학우회의 기본취지와는 달리 너무 예능 쪽으로 치우쳐간다는 지적과 비판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은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개편된 학우회 또한 이념 쪽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다는 점에서 학우회가 그 활동에 있던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재경마산학우회가 아직도 있기는 있을 것이고, 그렇기를 희망한다. 마산학생들의 재경대학 진학률이 높은 만큼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구심체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나름 연륜과 전통을 갖고 있는 재경마산학우회가 다시금 마산사람들 앞에 활기찬 모습을 나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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