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조(戀釣)‘라는, 옥편에도 없는 한자어가 있다고 한다. ’사랑을 낚는다‘는 뜻쯤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니, 말하자면 ’사랑이 이뤄진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옥편에는 안 나오는 조어식의 단어다. ‘연조’라는 이 단어에 얽힌, 어떤 마산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어 옮겨보고자 한다.
1950년대 초반 마산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어떤 친구사이의 얘기다. 두 사람은 모범생이었고 공부를 잘 했다. 둘 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한 친구는 문리대 정치학과, 그리고 또 한 친구는 공대 화공과다. 비록 대학에서 이과와 문과로 나뉘었지만, 둘의 우정은 계속됐고 깊었다. 문리대와 법대. 상대. 의대 등에 다니는 타 지역 출신의 학생들이 둘 사이에 모여들면서 이들은 조그만 모임을 만든다. 그 게 아홉명이 모였다 하여 '구인회(九人會)'로 정했고, 별칭하여 ‘블루 베인(Blue Vein)’으로 불렀다 한다. 이 별칭은 청년의 푸른 맥을 영원히 이어가자는 의미로 지어졌다. 이들은 거의 매일 만나 문학과 예술을 얘기하고 정치를 논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들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정치학과생은 학교에 남아 교수의 길을 걷고 있었고, 화공과생은 유수의 독일계회사에 다녔다. 다른 친구들도 언론계와 기업들로 각각 진출한다. 이들은 사회에 나와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대학에서의 우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모임을 이어 나간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너무나 이른 요절이었다. 바로 화공과를 나온 친구였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친구와의 우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세상엔 없지만 그 친구와의 우정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 한 대안이 나온다. 바로 죽은 그 친구의 막내 동생을 '구인회'에 가입시키기로 한 것이다. 막내 동생은 방학 때마다 마산의 집으로 내려오는 형의 친구들과 알고지내 이미 친숙한 상태였고, 서울에서도 모임에 자주 나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을 대신할 수 있었다. 동생은 당시 고려대학을 나와 서울의 한 언론사에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아무리 그리운 사람도 잊게 된다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회의 중견이 되어서도 이들은 먼저 간 친구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를 영원히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모임의 명칭을 바꾼다. ‘추구회(追九會)’라고 했는데, 먼저 간 친구의 끝 이름이 ‘九’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으로, 멤버는 대학시절의 친구들 그대로였다. 이 모임은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도 친구의 생일이나 기일이면 함께 만나 친구를 그리면서 대학시절 청운의 꿈을 이루고자 의기투합했던 그 시절을 추억한다.
‘추구회’를 통해 만나면서 이들 친구들은 죽은 친구를 위한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결혼도 못하고 죽은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마산출신인 정치과 교수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여인을 찾아보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여인은 요절한 그 친구가 마산고를 다닐 적에 제일여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친구는 그 여학생에게 연모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연모의 마음은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못했고 그저 살짝 얼굴 한번 보고 헤어지는 수준이었다. 모범생 소리를 듣고 있는 주제에 아무래도 집안 어른 등 주위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어쩌다 얼굴을 보기는 해도 직접 사랑의 표현이나 말은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편지로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그게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때 편지에 자주 쓴 말이 바로 ‘연조’였다는 것. 그 표현으로 자신의 그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수줍던 청춘의 시절, 만나기는 해도 그런 연애편지를 직접 전하기도 수월치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편지를 전하는, 이를테면 메신저가 있었다. 그 메신저가 바로 정치과 교수 친구였는데, 이쯤에서 실명을 밝히자. 바로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메신저였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김성우, 신동호 등 한국일보와 조선일보에 몸담았던 언론계 중진 등이고, 동생은 배효진 전 스포츠TV사장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동생인 배효진(마산고 15회)이다. 배효진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연조’를 ‘연작’으로 발음했다. ‘연조’로 쓰고 ‘연작’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게 맞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죽은 친구의 옛 여인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마산의 학교와 옛 주소 등을 통해 수소문도 해보고, 그 여인의 지인을 통해서도 알아보았지만, 그 여인이 한국에 없다는 사실 한 가지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수년이 흘러갔지만, 이들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낸다. 그게 지난 2004년이다. 그 여인은 1970년대 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여인과 연락이 취해진다. 그러나 그 여인은 마산 제일여고시절 알고 지내던 그 옛 마산고 연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려주고, 특히 편지를 통해 전달됐던 수줍은 사랑의 마음이 담뿍 담긴 ‘연조’에 얽힌 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옛 연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미 50여 년이 지난 먼 기억 속의 추억을 되살려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추구회’ 친구들은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그 여인을 그 이듬해인 2005년 한국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함께 들 만나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서 요절한 친구의 그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한참을 듣고 있던 그 여인은 그 제서야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연조’라는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전한 그 연인과 비로소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친구의 옛 연인을 찾아준 이들 친구들은 또 한 사람, 유명을 달리한 한 친구를 그리며 또 한 여자를 찾고 있다. 죽은 친구는 196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북한의 대남 지하당조직인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전향해 생명을 이어가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후 사형당한 김질락(金瓆洛)이고, 찾는 여인은 그의 부인이다.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닌 김질락도 이들 친구들과 같은 멤버로, 그의 부인과 함께 마산과도 인연이 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김질락은 삼촌인 김종태의 꼬임에 넘어가 통일혁명당 창당에 깊이 개입하고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가입한 후 북한의 지령으로 간첩 활동을 하다 체포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마산을 체포되기 전 피신처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김질락이 마산을 피신처로 삼은 것은, 요절한 ‘구인회’의 마산출신 그 친구와 친했기 때문이다. 통일혁명당에 대한 수사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김질락은 자신에게 조아드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도피에 나선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문리대 친구들을 찾아가 논의한 끝에 마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물론 문리대 친구들은 김질락이 지하당 간첩사건에 주모자로 연루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념 문제를 둘러싼 논란 등으로 시끄럽던 그 시절, 정치과출신답게 또 어떤 이념사건에 연루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친구들은 당시 죽은 형 대신에 모임에 나오고 있던 앞에서 언급한 그 동생 배효진에게 마산에서의 일자리를 당부한다. 배효진은 당시 마산에서 발간되던 일간지 경남매일의 주식을 매형과 나눠 갖고 있는 대주주로, 큰 형이 사장으로 있었다. 그래서 형인 사장에게 부탁해 김질락을 그 신문사의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앉힌다. 김질락은 기획실 일을 맡아하다 얼마 후 논설위원이 된다.
김질락은 1968년 중앙정부부에 의해 체포돼 구속된다. 김질락도 그랬지만, 주범인 김종태와 주모자의 한 명인 이문규를 체포하는 과정은 은밀하게 진행하는 하나의 비밀작전이었다. 정보부에서는 이들의 소재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일망타진을 위해 감시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규모가 파악되자 먼저 김종태를 잡고 나머지 주모자들을 잡을 계획으로 김종태를 체포한다. 하지만 김종태가 체포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김질락과 이문규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던지 갑자기 잠적해 버린다. 김종태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김종태의 신변위해를 우려해 뒤를 밟고 있었던 그의 처가 김종태의 체포됐으니 도망치라고 이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김질락은 이 소식을 듣고 출장을 빌미로 경남매일에서 빠져나와 도망 다니다가 지방도시 어딘가에서 체포된다. 이문규는 그보다 좀 더 후에 잡힌다. 김질락이 마산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처도 마산에서 제일여고 국어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역시 배효진이 매형에게 부탁해 마련해 준 것이다. 김질락의 부인은 경북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한다.
김질락은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전향한다. 전향의 의지를 담아 교도소 안에서 쓴 책이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나왔고, 2012년에 복간돼 나왔다. 이 책의 원제목은 ‘주암산(酒岩山)’이다. 김질락이 월북당시 평양에 있을 때, 초대소의 뒤에 있던 산 이름이다. ‘주암산’은 김질락이 처형당한 후 3년 정도가 지났을 때 당시 ‘북한연구소’가 펴내던 ‘북한’ 잡지에 연재됐던 글이다.
사상전향을 했고, 사형선고 후 4년을 복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질락의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안타깝게 혹은 의아스럽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 7.4남북공동선언이라는 남북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북한이 변절한 김질락을 그냥 놔뒀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아무리 전향을 했다 해도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당시 정권의 분위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그는 1968년 7월15일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져 버린다.
‘어느 지식인의 죽음’에는 그의 딸이 죽은 아버지 김질락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 나온다. 아버지 사형당시 6살이었던 딸은 처형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서대문교도소 앞에 정차된 차에서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 오빠가 시신이 담긴 관 앞에서 눈물의 큰 절을 올리는 장면도 담고 있다. 김질락의 처는 그날 교도소에서 김질락의 시신을 인수한다. 그 다음에 어떻게 했을까. 남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한다. 시신을 깨끗하게 씻긴 후 담요에 곱게 싸 옮기기 좋게 싸맨다. 그리고는 리어카로 서울역까지 옮긴다. 시신을 김질락의 고향인 영천으로 직접 옮겨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밤 열차에 태우고 영천으로 내려가 선산에 묻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질락의 친구들은 그 미망인과 자녀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은 모양이다. 미망인은 세상에 그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성장한 자녀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꼭 찾으려 한다. 아무리 좋지 않은 일로 변을 당한 친구지만, 그래도 60여 년 전 청운의 꿈을 함께했던 친구와의 우정만은 끊고 싶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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