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영화를 적잖게 본다. 코로나와 넷플릭스 덕분(?)일 것이다. 구독 초기 넷플릭스 영화 리스트를 대충 봤을 때는 내 눈에 연쇄살인, 치정, 폭력물들만 보였는데, 좀 부여잡고 보니 볼만한 게 꽤 있다. 엊저녁에 본 '더 포스트(The Post)'도 그 중의 하나다.
미국의 일간신문 워싱턴포스트에 관한 영화다. 좀 알만한 사람이면, 워싱턴포스트 하면 당연히 1972년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릴 것이고, 그래서 이 영화도 그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워터게이트 보다 1년 앞서 일어난 '펜타곤 페이퍼' 보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보도와 관련해 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언론 정신을 당시 사실을 기반으로 해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에서는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둘러싼 긴박한 장면과 함께 1970년대 신문 저널리즘 관점에서 이런 저런 볼 꺼리들이 많다. 예컨대 취재-기사작성-데스킹-편집-조판-인쇄 과정을 통해 신문을 촉박하게 만드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한 때 신문사 말석에 있었던 연고 때문인지 나름 추억에 젖게 해준다.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기분도 들게 한다. 우리나라의 척박하면서도 구질구질한 언론상황 때문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게 우리나라 언론이 아닌가. 아무튼 이 영화는 워싱턴포스트를 중심으로 한 언론의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다.
영화 내용도 그렇지만, 배역이 좋다. 벤 브래들리 국장역에 톰 행크스, 그레이엄 발행인 역에 메릴 스트립. 게다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았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원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재미와 함께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이런 스탭과 캐스팅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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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의 젖꼭지를 빨래 짜는 기계에 넣고 짜주겠다"(존 미첼)
"난 나의 기자들만 믿는다. 젖꼭지 부분만 빼고 그(미첼)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모두 다 기사화 해!..."(벤 브래들리)
두 말 가운데 위의 것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이를 취재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에 대해 닉슨과 그 측근들이 유형무형의 갖은 방법의 탄압으로 워싱턴포스트를 옥죄이던 와중에, 그래도 워싱턴포스트가 호락호락하지 않자 닉슨의 최측근인 존 미첼(John Mitchell) 당시 법무장관이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 Graham)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을 상대로 퍼부었던 욕설이고,
아래 말은 미첼의 이 말을 전해 들은 당시 워싱턴포스트 벤 브래들리(Benjamin Bradlee) 편집국장이 기자들에게 미첼을 포함해 권력의 어떤 위협에 절대 꿀리지 말고 취재 보도하라고 당부한 대목이다.
엊저녁 넷플릭스에서 '더 포스트(The Post)'라는 영화를 본 후 언뜻 생각이 나 이 두 말이 적혀있는 옛 메모장을 뒤적거렸더니 용케도 있었다. 여성 비하의 좀 얄궂은 표현이 있지만,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권력의 횡포, 그리고 그에 맞선 언론과 언론인의 결기, 이 두 가지를 상대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표현이다. 꽤 오래 전 예비 저널리스트들을 가르칠 적에 언론의 역할 강의용으로 적어놓았던 것이다.
'The Post'는 말 그대로 워싱턴포스트를 부르는 말인데, 그 호칭에 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지켜 낸 워싱턴포스트의 당당한 위상이 그대로 녹아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세계 언론자유의 기념비 같은 존재의 언론사다.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을 터뜨려 보도한 언론사다.
그러니 워싱턴포스트 하면 워터게이트, 워터게이트 하면 워싱턴포스트로 흔히들 연결짓는다. 워터게이트 하나만으로의 워싱턴포스트가 아니다. 그 이전인 1971년 더 큰 게 있다. 트루먼부터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대통령에까지 이르는 30년 간 비밀리에 감춰져온 미 행정부의 베트남전쟁 개입흑막이 담겨진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를 사운을 걸고 보도한 게 워싱턴포스트다.
'The Post'는 바로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다룬 영화다. 그레이엄 발행인과 브래들리 편집국장이 주역으로, 이 둘은 1년후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 두 기자와 함께 워터게이트에서도 역시 주역이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워터게이트 때도 그랬지만, 그레이엄 발행인은 '펜타곤 페이퍼' 보도에 자신의 모든 것과 사운을 건다. 워터게이트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펜타곤 페이퍼'가 워터게이트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를 주제로 메가폰을 든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펜타곤 페이퍼' 쪽에 무게를 두고 'The Post'의 주제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워싱턴포스트와 언론의 자유와 관련한 것이기 때문에 그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경쟁사와의 숨막히는 취재 경쟁과 권력의 집요한 방해공작, 그리고 그 어떤 가치보다 언론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편집국장과 회사의 운명을 걸어어 하냐, 마냐의 기로에 선발행인의 번뇌 등이 서로 엮어지면서 영화는 보는 재미를 더 한다. 재미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소 엇갈릴 수도 있다. 언론 쪽에 관심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의 경우가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미 대법원에서 워싱턴포스트 쪽의 손을 들어주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눈물도 좀 핑 돌았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끔 씩 우리나라의 척박하고 기막힌 언론현실이 떠 올랐다. 그 때마다 애써 잊으려 했다. 영화 속에 빠진 나를 자꾸 빼 내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름의 박수와 찔끔한 눈물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예의상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장면 사이사이 언론의 자유와 관련해 기억될만한 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기억에 남는 말이 떠 오르지 않는다. 한 가지 겨우 기억해냈다. 대법원 승소 장면 후인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의 어떤 기자인가가 읊조리는 말이다.
"언론은 피치자(국민독자)를 위한 것이지, 통치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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