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친구가 꿈에 나타났다. 모자를 썼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반가웠다. 내가 친구 보고 이름을 불렀다.
친구는 나의 부름에 나를 보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무표정으로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곁의 문이 있는 출입구 쪽에 섰다.
내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그랬더니 친구는 나를 언뜻 쳐다보더니 문으로 그냥 나가 버린다.
그런데 나가는 모습이 그랬다.
귀신이 아무런 물리적 행위없이 그냥 쑥 문을 관통해 연기처럼 나가는 것 같이
친구는 그렇게 그 문을 통해 사라졌다.
꿈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아, 저런 짓은 귀신이 하는 것인데 하며 두렵고 안타까워 했다.
친구의 꿈에서의 그런 모습이 오늘 많이 걸리적 거렸다. 무슨 꿈이 이런가 싶은.
며칠 전 본 죽음에 관한 한 유튜브 방송 때문일까.
사실 그 방송은 기존의 죽음 및 사후세계와 관련한 여러 시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종교적 사후관이 무시되는 측면도 강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위안도 되고 안도감을 안기는 측면도 있었지만,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구석도 다분했다.
아무튼 꿈이 너무도 생생하니, 그 유튜브 영상에 연계돼 나름 이런저런 망상에 빠지게 한다.
그 망상의 한 맥락에서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런 동영상에 빠지지 말거라. 나 보면 모르겠니...
혹여 친구는 그런 메시지를 나에게 전해주려 꿈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 꿈 때문일 것이다. 어제 온 종일 걸은 것은.
남양주 능내리 마재에서 한참을 걸었다.
친구가 하는 갤러리카페를 지나며 허연 머리 친구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봤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다.
친구를 만나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sorry my dear friend!
두물머리 풍광은 아름다웠다.
초여름이지만 한낮의 열기는 뜨겁다.
먼 산과 어우러진 강물은 황홀하게 다가왔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문득 꿈 생각이 났고 죽음의 모습이 저런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드넓은 연꽃밭엔 연꽃은 피지 않았고 연 이파리만 무성했다.
녹색의 연 이파리가 검푸른 강물과 함께 있지 않은 게 다행스럽게 보였다.
운길산 역에서 다시 양평으로 가 걸었다.
시장바닥을 걷고 또 걸었다. 지향이 없는 걸음이었다.
왁자지껄한 시장분위기에 파묻히고 싶은 심정, 그 또한 그 꿈 때문이었을까.
양평 역에서 전철을 타고오는데, 갑자기 지겨움이 치솟았다.
무작정 내렸다. 회기 역이었다. 역 구내를 또 한참을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종로3가 역에서 망설였다. 술 생각이 났다.
종로로 빠져나갈까 하다 그만 뒀다. 술 생각이 훅 사라졌다.
그 꿈 때문 만은 아니다. 근자에 내가 죽음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나는 신앙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고전적인 죽음을 바란다.
내 곁과 주변 분들도 모두 그렇게 세상을 뜬 것으로 믿고있다.
꿈에 친구가 나타나 나에게 던져 준 무언의 메시지도 나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 아무래도 얼마간은 죽음이 나의 화두가 될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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