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오디오, 그리고 CD의 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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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ife

구닥다리 오디오, 그리고 CD의 追憶

by stingo 2021. 9. 4.

몇 날 흐리고 비가 온 끝에 모처럼 날이 갠 아침,

햇볕이 거실로 찬찬히 내려앉는 것을 보면서 웬일인지 문득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구닥다리 오디오 기기들엔 먼지가 켜켜히 쌓여있다.

 

 

 

 

마란츠와 파이어니어, 그리고 월시(Walsh)의 옴(Ohm).

모두 예전에 아끼던 것들인데 그동안 잊고 살았다.

마란츠와 파이어니어는 그래도 살아있는지 불은 들어온다. 플레이어 안엔 cd가 들어있다.

모짤트의 디베르티멘토 563번. 기돈 크레머, 요요마, 킴 카시카시안의 협연 판이다.

이걸 언제 켜고 들었던지 먼지가 앉았다. 1년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먼지를 좀 닦아내고 다시 켜 본다. 옴 스피커는 잠시 큭큭 거리더니 제 방향을 잡아간다.

좋다. 옴 스피커의 특장은 부드러움이다. 음역도 넒다.

그 스피커에 얹혀 묻어나는 모짤트의 디베르티멘토. 역시 모짤트다.

 

 

 

 

생각난 김에 cd들을 살펴본다. 딴에는 그래도 한장 한장 정성들여 사 모은 것이다.

나름 명반도 몇 장 있다.

그 중 한 장은 1994년 프라하에 갔을 때 구입한 브람스. 스메타나. 야나체크의 cd.

체코 민주화의 상징인 바츨라프 하벨 당시 체코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체코 3대 국민음악가의 음반인데, 어떻게 운 좋게도 그걸 살 수 있었다.

그걸 산 그날 밤, 호텔 앞 '테레지아(Theresia)'라는 카페에서 집시들과 어울렸다.

그날 산 그 cd로 브람스의 '로맨틱 피스(Romantic Piece)'를 들었다.

붉은 피가 묻어나는 듬직한 레어 스테이크로 와인을 마시면서.

 

 

 

 

좀 길죽한 케이스에 담긴 cd가 나온다. 낯 익지 않은 cd다.

뭔가 봤더니, 이제하 선배의 노래가 담긴 음반이다. 이걸 여태까지 모르고 놔 두었던 것인가.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2016년 5월 경 선배의 개인전이 인사동에서 있었는데,

아마도 그 무렵 선배가 하시는 명륜동 '마리안느'에서 한잔하면서 받았던 것 같다.

그 때 개인전 카렌다도 함께 받았는데, '물의 여인' 그림이 표지인 그 카렌다는 여태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그 때 함께 받았던 cd는 여태 까먹고 있었다는 얘기다.

 

 

 

 

모두 10곡의 노래가 담겨있다. 모두 선배가 지은 노래다.

노래 글도 세 편, 서정주와 고 은의 것을 제하고는 모두 선배의 시들이다.

조영남이 불렀던 '모란동백'도 담겨있는데, 원제는 모란동백이 아니라 '모란, 동백, 김영랑, 조두남'이다.

 

 

 

 

노래들은 쉽고 평이해 듣기에 좋다. 음유적인 게 레너드 코헨의 느낌이 묻어 나오는 노래다.

선배의 음색은 약간 허스키하다.

그게 거친 느낌을 주면서도 뭔가 마음을 당기게 하는 이끌림을 준다.

선배 그림에는 말이 잘 등장한다. '허스키한 목청을 가진 말.' 말상인 선배는 나에겐 그런 이미지다.


오랜 만에 대하는 반가운 선배의 글도 있다.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詩다.

선배는 마산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950년대 초부터 시를 썼다.

'청솔...'은 1, 2학년 때인가에 써 당시 '학원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편지로 알게 된 서울의 친구를 생각하며 쓴 글인데,

그 친구 분은 몇해 전에 별세한 유경환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다.

 

10곡 중 유일하게 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는 장순아라는 여자 분이 부르고 있다.

청아한 목소리의 이 곡은 동요같은 느낌을 준다.

선배의 cd 노래를 다 들었다. 갑자기 나도 옛날처럼 노래를 다시 불러볼까하는 생각을 안긴다.

이제하 선배 노래의 리듬은 단순하다. 그러나 노래 글은 심오하다.

이게 어우러져 뭔가 생각에 젖게하는 노래들이다.

 

 

 

 

선배의 이 cd도 나의 명반에 포함시켜야겠다. 그나저나 선배의 근황이 궁금하다.

sns에서 그림과 글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다가 어느 날 문득 사라졌다.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지만, 얼마 후 어떤 후배로부터 인사동에서 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cd를 우연하게 만났고 노래도 들었으니, 명륜동 '마리안느'로 가 품평(?)이라도 한번 해 드려야겠다.
다시 한번 말해야겠다.

오늘 모짤트를 듣고 이제하 선배의 cd도 보고 노래를 듣게 된 계기가 있다.

순전히 아침 햇살 때문이다.

몇 날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 오늘 아침 맑고 밝은 햇살을 내려 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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