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일본에 후랑크 나가이가 있었다면,한국엔 후랑크 백이 있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일본의 엔카가 많이 불리었다. 후랑크 나가이(1932-2008)는 당대 일본 최고의 저음가수로, 그가 재일교포라는 점에서 한국 팬들에게 상당히 친숙했고, 특히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경기에 애국가를 부르는 등 고국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다.
후랑크 나가이의 최고 히트작을 꼽는다면 1958년에 부른 '오레와 사비시인다(나는 쓸쓸해)'다. "사요나라 사요나라"라는 가사와 구성진 리듬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이 노래는 당연히 한국에서도 많이 불리었다. 7살이던 나도 흥얼거릴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한국에서도 후랑크 나가이를 흉내내는 가수가 많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단연 후랑크 나가이 이름을 딴 후랑크 백(1938-1990)이 으뜸이었다. 물론 한국의 후랑크 나가이하면 남일해가 꼽혀진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후랑크 백이 남일해보다 후랑크 나가이 풍의 노래를 더 잘 부른다는 평이 많았다. 후랑크 백의 대표작이 바로 1965년의 '사막길'이다. 이 노래를 중학생이던 나도 그 때 많이 불렀다.
엊저녁에 유튜브 서핑을 하다 이 노래가 수록돼있는 레코드를 발견한 건 뜻밖이었다. 재미있는 건 후랑크 백의 '사막길' 이 노래가 수록된 레코드판의 재킷 타이틀이 이미자가 부른 '울어라 열풍아'라는 노래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백영호 작곡의 '사막길' 이 노래는 출반당시 그리 큰 기대를 않고 서브 타이틀로 이미자 노래에 끼워냈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이 레코드 판에 얽힌 추억이 있다.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는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주제곡이었다. 이 영화를 2개봉관이던 마산 동보극장에서 '식모누나'와 함께 봤다. 영화를 보던 누나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박수를 치다 그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기도 하던. 이 영화를 본 후 집엘 왔더니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다. 양판가게에 가서 이 레코드를 사오라는 것이었고, 나는 단숨에 달려 추산동 양판가게에서 이 레코드를 사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 후 며칠 간 우리집에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라 열풍아' 노래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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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울어라 열풍아'보다 후랑크 백의 '사막길'이 더 좋았다. 엊저녁에 다시 들어본 후랑크 백의 '사막길'은 역시 백미였다. 부드러운 저음의 낭랑한 목소리. 이 노래를 들으며 한동안 추억에 젖었다. 참고로 1962년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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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랑크 나가이와 후랑크 백은 6살 나이 차이가 나지만 거의 동시대 가수들이다. 둘의 기구한 인생역정 가운데 한 가지가 극적으로 닮았다. 후랑크 나가이는 1985년 자살을 기도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았다. 후랑크 백은 1990년 부산 구포다리 인근에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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