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나의 대학졸업 논문이 북한언론에 관한 것이다.
우리 때부터 졸업논문제가 실시돼 논문 통과없이는 졸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북한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은 일종의 편법이다.
다른 사람이 별로 손 대지 않은 영역,
그러니까 지도교수 조차도 잘 모르는 분야의 것을 쓰면 쉽게 통과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때는 북한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전공자가 별로 없던 시기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북한의 언론에 관한 논문을 썼고,
희귀했던 탓인지 내 논문은 우수논문으로 채택돼 과 학회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게 계기가 돼 졸업 후 일자리도 그 쪽이었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더러 많이 알게됐다.
지금은 다들 고인이 되신 김창순, 김남식, 조덕송, 이기봉 씨를 비롯해 김준엽, 양흥모, 김갑철 교수 등으로,
이 분들은 우리나라 북한연구의 1세대들이다.
이 분들 중 북한연구소 설립을 주도했고, 오래 이사장을 역임한 김창순(金昌順; 1920-2007) 선생은 1970년대 말,
내가 한 때 모시기도 했다.
이 분과의 인연을 생각하자면, 그 한 매개는 술이다.
평북 의주 출신의 선생은 북한의 내각 격인 정무원 기관지 ‘조선신보’ 주필을 하다
1953년인가 월남한 이래 북한연구에 매진하셨던 분이다.
선생은 월남 후 어려울 적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수주 선생은 호주가로 유명하신 분인데,
선생은 술을 수주 선생으로 배웠다고 했다.
선생은 자연 수수와 많은 술을 마셨고,
그 결과로 몸이 많이 상해 내가 모실 적에는 술을 한모금도 마시질 못하는 처지셨다.
그러니 이런 저런 술자리로 곤혹스러워 할 때가 한 두번에 아니었다.
그 무렵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선생의 술을 대신 마시는 역할을 하게된다.
리셉션 등 모임에서 나는 선생을 수행비서처럼 따라다니면서 술을 대신 마셨다.
선생이 술을 받으면 남 모르게 나에게 술잔을 건넨다.
그러면 나는 그 술을 역시 남 모르게 마시고는 그 잔을 선생에게 다시 주는 역할이었다.
한창 술 많이 마실 나이였기에 나는 그 역할이 좀 웃기는 짓이었지만, 나름 재미있기도 했다.
그렇게 술을 대신 마시다 내가 취해버리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1978년 망년회 때는 선생의 술을 너무 많이 대신 마시는 바람에 대취해
4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선생과는 그런 희한한 인연이 있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없었지만,
북한연구소 하면 김창순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선생의 소식은 간간이 듣고있기는 했다.
그러다 2007년인가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별세 한참 후에 전해 들었다.
오늘 어떤 분이 SNS에 북한연구소와 관련한 글을 포스팅한 것을 우연히 보게됐는데,
그 글을 보면서 문득 김창순 선생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분과의 인연을 한번 떠 올려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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