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통영에서 개최된 고등학교 모교 졸업 50주년 행사 가는 길에 하동과 함양의 몇몇 고가들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동 개평마을에 있는 조선중기 문인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옛집인 ‘일두(一蠹)종택’과 함양 산청 남사리 예담촌의 ‘최씨고가’ 등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여창 선생의 옛집이 인상 깊었습니다. 정여창 선생에 대해 좀 알고있다고 생각해왔던 저로서는 비록 주마간산 격이긴 하나
이 옛집 탐방을 하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알고있었던 건 정말 아주 지엽적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두종택’은 그 옛집 전체가 그야말로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한 정여창 선생의 성리학의 산실로 다가왔습니다.
적잖은 충신과 효자를 배출한 일두 선생의 옛집 답게 온 집이 충과 효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그 흐름이 지금에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정여창 선생의 호가 ‘일두’인데, ‘두(蠹)‘가 좀 어려운 한자로 좀벌레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도 저로서는 처음 알았습니다.
학문에 대한 겸양의 뜻으로, ‘한 마리의 좀벌레’라는 호로써 평생을 학문에 매진코자 하는 선생의 결의가 담겨진 것이지요.
사랑채의 건축양식이 좀 독특했습니다.
사랑채 안에 ‘탁청재(濯淸齋)’라 명한 별도의 루(樓)를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조선의 건축적인 측면에서 ‘내루(內樓)’라 한다고 하는데,
많은 고가들 가운데서도 보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두 선생은 사랑채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뭔가 마음을 새롭게 할 일이 생기면
여기 ‘탁청재’로 와 정좌를 하고는 마음을 다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일두고가’를 둘러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가 또한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한강(寒岡) 정 구(鄭 逑)선생이 정여창 선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되 것입니다.
정여창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큰 화를 입은 선비였습니다. 그 화가 오죽했으면 부관참시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니 선생의 글 또한 화를 입었을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의 글들이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건 한강 정 구선생의 공이었으니,
정 구 선생이 일두 선생 사후에 이리 저리 흩어져있던 일두선생의 글들을 찾고 모아 각고의 노력 끝에 문집으로 재정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구 선생이 누구입니까.
한강 선생은 내 고향인 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학자입니다. 바로 서원골에 있는 관해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거니와
함안군수 시절 두척산(무학산)에서 이 지역의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분이기도 합니다.
선생 사후에 제자들이 ‘회원서원’지어 학문에 매진한 것은 한강 선생의 뜻을 이어 받으려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그 회원서원이 있었던 탓에 무학산 아래 물맑은 계곡 이름이 ‘서원골’이 된 것이지요.
회원서원은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관해정 하나만 남게됐습니다만,
아직도 관해정에서는 매년 한강 선생을 추모하는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한강 선생과 일두선생과의 이런 관계를 여즉껏 모르고 있었으니 제가 그래서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일두종택’ 안채 대청마루 댓돌에 흰 여자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고운 순백의 고무신이었습니다.
이 고무신이 왜 여기 놓여져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택 탐방을 끝내고 나와 버스를 탔을 때도 그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의문은 여전합니다. 왜 여자 고무신 한 켤레가 안채 댓돌 위에 단아하게 놓여져 있을까요. 그리고 누구의 신발일까요.
#일두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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