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연세대 금호아트홀에서의 친구 딸래미 이정은 양의 피아노 독주회. 베토벤 소나타 만으로 꾸려진 레퍼토리라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선율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14번 '월광'과 21번 '발트슈타인'을 빼고는 처음 듣는 듯 감미롭고 신선했다. 정은 양의 곡에 대한 촘촘한 해석력과 연주의 테크닉, 그리고 무엇보다 건반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부드럽고 감미롭다가 때로는 뇌우가 쏟아지는 듯한 열정과 강렬함으로 몰아치는, 하여 도대체 강온과 음역대를 가늠할 수 없는 자유로운 손놀림이었다.
정은 양의 연주에 빠져들면서 이런 지점들에서 문득 라흐마니노프가 떠올려졌고 그에 연관되어 정은 양의 '손'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났다.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고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뛰어난 피아노연주 실력이 그의 큰 손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손의 한뼘 길이가 무려 30cm나 되는 라흐마니노프는 이 솥뚜껑같이 큰 손으로 대략 13도 정도의 음을 한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건반장악력이 어떤 누구보다 뛰어났었기에 그런 연주를 할 수가 있었다.
정은 양의 연주회가 끝나고 함께 사진을 찍는 순간에 나는 정은 양의 손을 살짝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정은 양의 손은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그냥 보통의 평범한 손이었다.
연주회장을 나와 뒤풀이에서 나는 정은 양의 아버지가 되는 친구에게 짓굳게 다시 물었다. 친구의 대답 또한 보통 크기의 손이라 했다. 친구는 그러면서 나의 뜬금없는 물음에 정은 양이 라흐마니노프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정은 양은 라흐마니노프의 손처럼 큰 피지컬은 갖고있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대신,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라흐마니노프에게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마지막 사진은 라흐마니노프가 죽기 전인 1942년 12월에 찍혀진 그의 손이다)
#이정은피아노독주회
'colle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 와인과 콩티 공작, 그리고 모차르트 (1) | 2023.12.27 |
---|---|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다시 읽고 번역해 보기 (1) | 2023.12.23 |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by William Styron (0) | 2023.12.15 |
친구의 蘭, ‘종포蘭’ (1) | 2023.11.13 |
미국의 지인이 보내온 Vintage Sony DSC-F717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테스트 사진들 (0) | 2023.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