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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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라흐마니노프의 여인들

by stingo 2023. 12. 25.

1900년대 초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 전성시절, 라흐마니노프에게 열광한, 지금으로 치면 '광팬'들이 많았다. 지휘자로서, 혹은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서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장 로비는 '우상'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하여 운집한 추종자들로 늘 붐볐다. 라흐마니노프의 자택에는 그와 통화를 하고 싶다며 쭈뼛쭈뼛 운을 떼는 여성 팬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여자, 테클라 루소라는 팬은 남편을 여의고서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라흐마니노프의 콘서트를 관람한 후 제 정신을 추스렸다고 한다. 그녀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콘서트에 - 시기와 지역을 불문하고 - 하얀색 라일락 꽃다발을 선물로 보냈고, 덕분에 이 여인은 '하얀 라일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인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라흐마니노프가 유럽으로 떠났을 때 그의 파리 공연에까지 꽃을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

​또 한 여자로 마리에타 샤기난(Marietta Shaginyan)이라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젊은 시인이 있다. 샤기난은 라흐마니노프의 공연 때마다 극찬의 펜레터를 보내는데, 발신인 자리에는 늘 'Re'라는 음표 D를 가리키는 표식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인상에 각인된 여성이다. 이후 라흐마니노프와 샤기난은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는 친구사이가 됐으며, 때때로 라흐마니노프는 샤기난에게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 샤기난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러시아의 영혼을 구제할 것이라 믿는다며 라흐마니노프를 격려하곤 했다.


마리예타 샤기난


"모든 건 지나가리. 모든 건 무너지리. 모든 건 지겨워지리
(Tout passe, tout casse, tout lasse)."

​라흐마니노프의 러시아 전성시절인 1910년대, 그와 연분을 주고받은 여자가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유명한 '여섯 편의 가곡집 작품38'을 헌정받아 이 곡을 노래한 젊고 재능있는 가수 니나 코시치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가곡집이 코시치에게 헌정됐을 때 주변들은 의아해 했다. 당연히 이 곡들은 라흐마니노프와 당시 정신적 교분을 나누고있었던 아르메니아 출신 시인인 마리예타 샤기난(1888-1982)에게 헌정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코시치가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둘 간의 연정은 싹트고 있었던 것인데, 라흐마니노프는 당시 '페티코트를 입은 샬리아핀'이라는 찬사를 받고있던 코시치의 음악성과 아름다움, 활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둘은 음악적 동반관계를 통해, 아니면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빠져들었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아내 나타샤도 이 무렵 둘 간의 애정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코시치가 라흐마니노프보다 18세나 젊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73-1943)에게 마음이 가고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사실을 감지하고 1917년 7월 코시치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의 몸에 내리쬐는 두 개의 태양 가운데 그녀는 오래 전부터 알아온 늙은 태양보다 젊은 태양에 몸을 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늙은 태양은 자신인 라흐마니노프였고, 젊은 태양은 프로코피예프라는 비유였다. 코시치와 프로코피예프와의 연분관계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코시치는 바람끼가 다분한 자유분방한 여자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위의 문구는 코시치가 프로코피예프에게 준 그녀의 사진에 적은 글인데, 그로써 그녀는 프로코피예프와의 작별을 고한 것이다. 이 문구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명한 문구를 떠올리게 하는, 눈에 많이 익은 것이라는 점에서 코시치가 이 문구를 인용하면서 두어 마디를 보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제정말기의 유명한 가수이고 라흐마니노프의 연인이었다는 점에서 코시치는 기억할 만한 인물로 보이는데, 하나 이상한 건 코시치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읽고있는 <라흐마니노프>에 코시치의 초상화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 여자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자료는 없다는 게 궁금점을 더하게 한다.


나나 코시치




#샤기난&코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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