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성우 김세원, 그리고 ‘밤의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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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원로성우 김세원, 그리고 ‘밤의 플랫폼‘

by stingo 2024. 10. 4.

김세원, 이 분 이름 앞에도 이제는 ‘원로성우’라는 접두어가 붙는다. 1945년 생이니 이제 8순에 접어든 나이, 예전 그 아리따운 모습을 돌이켜보니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1970년대 매일 밤 10시 넘어 나오던 동아방송 ’밤의 플랫폼‘으로 그 시절 저마다들의 밤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그 촉촉한 목소리는 그러나 아직도 여전하다. 그로써 황금연못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지금도 구가하는 현역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분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이즈음이 그 시점이었으면 좋겠다. 나이도 연만하셨고, 그러니 마음에 남은 상처도 녹았거나 아니면 녹일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나는 아마 누구 누구를 아세요? 하고 물을 것인데, 그 첫 반응을 보고 나는 다음 말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73년 개성 송악산 바로 앞에 있는 송악OP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나하고는 부대가 달랐다. 나는 1사단 소속이었고, 그 사람은 특전사 대북방송병으로 나보다는 고참이었다. 둘은 친했다. 그의 방송벙커에서 술도 자주 마셨다. 이 사람은 보직상 라디오를 많이 만지니, 그의 벙커방에 가면 노상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나를 불러 갔더니, 술을 사다놓고 같이 마시자 했다. 그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이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이었다. 그날 밤 같이 술을 마시면서 그 사람이 ‘밤의 플랫폼‘의 대단한 청취자라는 걸 알았다. 그 후에도 밤에 그 벙커로 놀러가면 항상 그 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그 사람은 김세원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나에게 털어 놓았다. 나는 인기있는 방송진행자와 그 방송을 좋아하는 청취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그런 관계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김세원을 어릴 때부터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던, 말하자면 남매 같은 사이였다는 걸 그 사람은 나에게 흡사 무슨 비밀을 털어놓듯 얘기했다. 나는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 얘기를 나에게 한 후 이 사람이 좀 이상하게 보였다. 조울증이 좀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안기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아주 기분 좋아하는 명랑한 모습이었다가, 어떤 때는 울적해 하면서 가끔씩 울기도 하는 것이 그랬다. 그런 행태에 대해 나는 그냥 원래 성격이 저런 것이구나 하고 여길 뿐이었지만, 나름으로는 만날 때마다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 사람은 서울로 외박을 포함해 외출을 자주 나갔다. 귀대할 적에도 전혀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형태를 보였다. 기분 좋게 들어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자유의 다리 입구 휴게소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미군 스리쿼터에 실려오는 날도 있었다. 고주망태가 되어 귀대한 날 밤에는 울고 불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기분 좋게 들어온 날에는 먹을 것을 잔뜩 사갖고 와 벙커에서 술판을 거나하게 벌이기도 했다.

매일 라디오를 끼다시피해 듣고있는 ‘밤의 플랫폼‘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많은 말을 수시로 했다. 놀라운 것은 어떤 때 어떤 방송이 나올 것이라는 방송 내용을 예측한다는 것이었다. ’밤의 플랫폼’은 매일 한 가지 주제를 잡아 진행했고, 그 주제는 다양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끔 이 사람이 그 방송의 주제를 미리 알고 나에게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고, 그날 밤 방송은 그 사람이 얘기해주는 주제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기억에 이런 게 있다.

그 사람은 가끔 내가 근무하는 벙커로 들리기도 했는데, 어느 날 와서는 이런다. 오늘 밤 방송이 재미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주제로 하는 것이니까, 와서 같이 듣자. 그날 밤 나는 그 사람 벙커로 갔고, 그날 그 방송은 그 사람이 예측한대로 ’위대한 개츠비’를 주제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H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 입대했다. 전공이 서로 같은 것이었기에 친해질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쨌든 제대 후 어떻게 어떻게 하자는 어설픈 계획까지도 서로 얘기를 나누곤 하던 사이였다.


그 해 8월 장마비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며칠 장대 같이 내리던 날 밤이었다. 자정쯤이었을까, 눅진한 내무반 잠자리와 비오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해 설쳐대던 그 어느 순간 “푹”하는 이상한 소리가 내무반 위, 그 사람 벙커 쪽에서 들렸다. 이어 또 한번 “푹”하는 소리가 났다. 조금 있으니 그 벙커 쪽에서 불이 켜지고 발자욱 소리가 어지럽게 오갔다. 누군가 자살을 한 것이었다. 모포를 댄 머리 쪽을 권총 두 발을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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