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공덕동에서 좋은 분을 만났다. 상면으로 뵙기는 처음이지만, 이미 아는 처지라 해도 무방하겠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분이다. 김희곤 선생의 글을 나는 좋아한다.
선생은 행정학이 주전공인데, 전공과는 무관한, 주로 고전한문에 관한 글을 정갈하게,
그리고 깊이있게 거의 매일 올리고 있고, 그 방면에 거의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선생의 글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
오늘 선생과의 만남은 책을 싸는 봉투가 계기가 됐다.
나에게 그게 없고 구할 줄도 몰라 쩔쩔 맨다는 식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선생이 연락을 해왔다.
갖고있는 것 중에 여분이 있으니 그것을 나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뵙게 되었는데, 선생은 적잖은 양의 그 봉투를 손수 들고 나왔다.
선생과 만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이 어머님 상을 당했고, 선생은 숙부님 상을 당했다.
선생과 만나기로 처음 약조된 날은 나의 어머님 상의 와중이었기에 부득이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연기된 그 날이 오늘인데, 어제는 선생이 숙부님 상을 당했다. 그래서 나는 또 연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은 오늘 올라오셨고 그래서 만날 수 있었다.
한 세시간 가량 적잖은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은 맛있는 저녁을 베풀었고, 나는 커피를 대접했다.
찻집 문을 닫는다는 시간이 될 때까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종업원이 알려주는 바람에 우리들은 시간이 그리 된 줄을 알았다. 나는 선생의 항상 공부하는 자세,
그리고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평가하는 말을 좀 많이 했다. 선생은 내 말이 약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성취감과 보람이 깃든 생각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나는 그게 선생의 최소한의 자부심의 표현으로 들렸다.
선생의 장인되시는 분이 나의 마산고등학교 21회 대선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와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도 우리들 대화의 맛깔스런 양념이 됐다.


선생은 나와 만나고 난 후 귀가해 얼마되지 않아 한 편의 글을 올렸다. 맛깔스런 글이다.

行政史 연구의 어려움과 초서 해독의 한계
공부라는 것이 고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학처럼 고되고 재미없는 학문도 드물 것이다. 行政史 연구를 위해 한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이 학문이 단순히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단계를 훌쩍 넘어선다는 점이다. 한문 텍스트를 읽으려면 당시 시대의 언어와 문자 표기, 필기법에 익숙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대 중국어와 고대 중국어는 같은 언어라기보다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진 별개의 언어다.
특히, 행정사(行政史)를 연구하려면 단순히 한자와 한문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한문 표현법, 한글로 기록된 당시 한국어, 그리고 한글 외 한국어를 기록한 이두 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 여기에 더해, 행서와 초서라는 필기 방식도 익혀야 하는데, 이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초서는 그 자체로 난관이다. 초서는 붓으로 빠르게 쓴 글씨체로, 글자 형태가 단순화되거나 연결되어 쓰인다. 쓰는 사람에 따라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라도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문맥 없이는 해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초서로 쓰인 간찰(簡札)을 보면서, 나는 이 분야가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를 실감했다. 사학 연구자들조차 초서를 읽는 기술을 익히지 못해 중요한 원사료들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행정사(行政史)는 단지 언어와 문자를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학문은 고고학, 금석학, 문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등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만 연구가 가능하다. 행정사(行政史)를 연구하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이 고되고 지난하다.
예산과 재무행정 전공을 하다 늦게 행정사(行政史) 연구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나는 이 분야가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초서 해독에서 난항을 겪으며, 내 자신의 능력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초서는 단순히 글자를 아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속에 담긴 문맥과 필자의 의도를 읽어내야만 한다. 나는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문턱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한학과 행정사(行政史)연구는 재미있다고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연구가 흥미롭다고 해서 이 길을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한학과 행정사(行政史) 연구는 단순히 열정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학문의 영역이다.
이 길을 걷는 데 필요한 학문적, 정신적 체력은 엄청나다. 행정사 연구를 위해 한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이 학문이 지닌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내 힘이 부친다는 점이다. 한계를 인정하며, 내 노력도 아직은 부족함을 고백한다.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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