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고 낡아 빠진 집 거실이 훤해졌다. ‘무엇’을 송두리채 빼버린 것이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오디오 시스템이다. 붙일 말이 마땅치 않아 오디오 시스템이라 했지만,
옛날 말로 하자면 전축과 스피커 등인데, 그것들을 몽땅 치워버린 것이다.
목록은 이러하다. 마란츠(Marantz) 2258 앰프, 파이어니어(Pioneer) CD/LD 플레이어,
옴(Ohm) 스피커, 그리고 턴테이블. 그래도 한 때는 다들 명품들로 취급받던 것들인데,
오늘 미련도 없이 그냥 싹 내 주었다.
근 30년 갖고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것이라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씨원’하기도 하다.
여동생들과 매제가 설날이라며 오늘 오빠 집에 왔다.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비우기,‘ 혹은 ‘비우는 일‘로 화제가 모아졌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젠 갖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버리고 비우고 살아야 한다는 것.
아무래도 내가 제일 연장자라 말을 많이 했으니, 결국 내 처치를 빗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산본 사는 막내 여동생이 클래식에 빠져 있다고 매제가 얘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문득 내심, 속으로 그러면 막내 여동생에게 뭘 하나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CD장에 진열해 놓은 CD 몇 장이 눈에 들어왔다.
에브게니 키신(Evgeny Kissin)의 라흐마니노프 연주곡, 그리고 체코에서 만든것으로,
내가 애지중지하던 드볼작 곡 등이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저기 눈에 보이는, 몇 장인지는 모르지만 저 CD를 갖고가서 들어라.
그러다가 CD 장 위에 놓여진 앰프와 플레이어 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저것들도 여동생에게 줘버려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야 내가 한참 장광설을 펼쳤던
‘비우기’와 매칭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걸리도 몇 잔 마셨겠다 그래서 호기를 부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전축 등을 몽땅 갖고가라고 여동생 내외에게 얘기한 후 즉각 실행에 들어갔다.
바깥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그 짐들을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갖고 오느라 힘이 들었다.
매제 차 트렁크에 다 들어가질 않아 뒷좌석에도 실었다. 그리고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3, 4백장 정도 되는
CD도 몽땅 갖고 가라했다. CD 3, 4 백장이면 그 양과 무게도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다음에 갖고 가기로 하고 우선 CD장 앞에 진열해 놓은 10 장 정도만 챙겨주었다.
그것들을 다 치우고 아내는 매체와 여동생들과 놀았다. 막걸리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조금 전 그들은 떠났다. 그들을 바래다 주고 올라와 집으로 들어섰을 때 바야흐로 ’신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거실 한 쪽면이 훤해진 것이 그랬다. 아내도 무척 ‘속씨원’해 했다. 나도 물론 그랬다.
비웠다. 그러면서도 채워지는 게 있었다. 그건 숨통, 다른 말로 여유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Kissin의 그 CD가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란츠 2258을 찾기 위해 세운상가를 뒤지던 일,
황학동, 가수 김정수의 동생인 김용수가 하던 가게에서 그 무거운 옴 스피커를 사서는 용달차에 싣고
집으로 와 들어 올리느라 입에서 풀풀 단내가 나던 일 등이 떠올랐다.
1996년 추운 겨울날이었을 것이다.

#비우기#채우기
'myself'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送年考 (0) | 2024.12.31 |
---|---|
correctiveness, 혹은 correctness - 정확하고 올바르다는, 그러나… (1) | 2024.12.28 |
90줄 나이라면… (0) | 2024.09.13 |
낮술, 혹은 ‘설주(晝酒)’ (0) | 2024.08.15 |
오 늘 (1) | 2024.06.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