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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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elf

‘손글씨’ 쓰기

by stingo 2025. 3. 20.

아침에 난감한 기분에 젖었다. 뭔 일을 하는데 되지를 않는 것이다.
할 수 있던 일인데, 오랜 기간 잘 하질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면 될 일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천천히 하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보다는 먼저 절망감이 드는 것이다.
아, 이런 것 조차가 이제 잘 되지를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

그것은 다름이 아닌 손글씨를 쓰는 일이다. 대구 동생에게 우편으로 뭘 보낼 생각으로,
곁들여지는 짤막한 몇 글짜를 쓰고자 하는데, 글이 쓰여지지를 않는 것이다.
우선 종이를 놓고 펜을 들면서 마음이 들떠기 시작했다. 이건 손글씨를 써야하는 처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응이다.
나는 손글씨를 잘 쓸 수가 없다는 어떤 선입관 같은 것이랄까…
물리적인 측면에서도 물론 난관이 있다. 손떨림이다.
이건 예전에 많이 마신 술 탓으로 감수하고 있는 터였는데,
정작 늘그막에 이런 장애를 안길 복병인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하기는 했다. 쓰기는 겨우 썼다는 얘기다.
마음에 들리가 없는 글씨다. 글씨에 자신이 없으니 짤막한 내용 조차도 엉망이다.
두번 째로 썼다. 이건 더 엉망이다. 세번 째를 쓰려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사람에게 보내는 글도 아닌데, 그냥 아무렇게나 적당하게 쓰면 될 것인데 하는.
그러고보니 첫번에 쓴 게 그나마 나아 보였다.
그래서 글짜가 심하게 삐뚤빼뚤하거나 배배 꼬여진 것은 직직 긋고 고쳤다.
문장 몇 부분도 그랬다.  

나는 그래도 옛날 초급학교 시절엔 영어 펜맨십도 그렇고 글씨 잘 쓴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글씨 쓰는덴 자신감이 있었다. 군시절에는 나름의 그 기량으로 각종 차트까지 도맡아 썼다.
그런 글씨가 나빠진 것은 아무래도 기자 시절의 버릇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일종의 직업병에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취재는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손이 재빠르고 균형있게 잘 움직이고 잘 따라줘야 한다.
특히 대인 취재는 임기응변의 질문으로 대답을 캐치해 노트에 핵심 포인트를 빨리 적는 것을 잘 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 오래 시달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내 글씨가 엉망으로 변해있는 걸 알게됐다.
그걸 알고 의식적으로 글을 좀 침착하게 잘 받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쳐지지가 않았다.
더 큰 문제가 또 있었다. 취재수첩에 써놓은 내 글을 내가 알아보지 못해 난관에 봉착하는 일이었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도무지 알아먹지 못한 글을 써놓은 수첩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가끔씩 꿈으로도 꾼다.

몇달 전 내가 영어성경쓰기를 한동안 한 것도,
나의 글씨를 바로 잡아보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된 나름의 프로젝트였다. 한 4개월 간을 매일 하면서 <사도행전>을 떼고
<로마서>에 들어섰는데, 끄트머리 얼마를 남겨두고 지금은 중단 상태에 있다.
영어성경쓰기를 하면서 나는 나의 글씨가 서서이 살아나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상당히 보람된 생각을 갖기도 했다.

이 보람있는 일을 중단한지도 꽤 된다. 왜 중단했는지는 아무래도 중이 지 머리 깎을 수 없다는 말을 변명으로 삼고자 한다.
오늘 모처럼 글쓰기를 하다 심한 낭패감을 느끼고는 영어성경쓰기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래 사진은 몇달 전 영어성경쓰기할 적에 노트에 적은 내 글씨다)







#손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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