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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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책과 사람

by stingo 2025. 4. 13.

서재 방에 우두커니 앉았는데, 책 더미 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와 꺼내 보았다.
<Famous Sayings>.
1966년 평화출판사에서 간행됐으니 옛날 책이다.
문고판으로, 가격은 250원, 시쳇말로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의 것이다.
우리 말 제목은 <말, 말, 말>이다.
동서고금의 인용구(quotations)을 모아놓은 책으로, 예전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많이 이용했다.
나도 1998년 신문사를 나오기 전까지 글을 쓰면서 이 책 덕을 많이 봤다.
정치 칼럼을 쓰면서 “The public is the best judge(세상이 최선의 심판자)”,
“Such is the government, such are the people(정부가 정부라면, 백성도 백성)”이라는 문구를 많이 인용했다.
적잖은 세월이 지났지만,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 시국상황을 보며 이 문구들을 다시 접하니
지금도 여전히 시의적절한 인용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내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김 각(1935-2011) 전 코리아헤럴드 논설위원이 나에게 준 것이다.
종로5가 한 허름한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 가방에서 이 책을 꺼내며 “자네, 이 책이 필요할 걸세”하며 주셨다.
김 위원님으로부터 책을 얻은 게 한 두어번이 아니다. 그것도 거의 반드시 술자리에서다.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풍성한 얘기를 하시다 갑자기 그 얘기들에 엮여지는 책을 주시는 것이었다.
소설책도 많이 주셨다. 언젠간 남북이산가족들의 신산한 삶을 말씀하시다가,
그 해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주셨다.
그 책에 그 해 수상작인 이영균의 ‘어둔 기억속의 저편‘이 들어 있었다.

얘기가 좀 다른 곳으로 새는 것 같은데,
김 각 위원이 2011년 돌아가신 후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들었다.
그리고 그리워졌다. 추모의 마음으로 그 분의 흔적을 찾아보니 남은 건 없고,
달랑 이 책 한 권만 남은 것이 참 안타깝고 송구스러웠다.
김 각 그 분에 관한 자료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오늘 한번 좀 세밀하게 찾아봤더니, 딱 두 개의 자료가 나온다. 하나는 성함은 나오질 않는데,
김 각 위원과 함께 하와이대 ’둥서문화연구소(EWC)’ 유학한 분이 60년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에 짤막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 각 위원의 사위에 관한 것으로,
주 아무개라는 이 분이 장인인 김 위원 작고 후 장인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를 어느 대학에 기증했다는 짤막한 글이다.
그렇다. 김 위원님에게는 딸이 한 분 있었다.
생전에 위원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어쩌다 한번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사위가 장인을 언급하고 있는 글이 그것이었다.
나는 짤막할지언정 이 두 편의 글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것을 빼놓고는 김 각 위원에 대한 그 어떤 자료도 나오질 않았다.
작고한 우리나라 중견 언론인에 대한 자료관리가 이렇게 허술한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내가 김 각 위원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종로 탑골공원에서다.
그때 김 위원님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위원님은 말을 잘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자주 뵐 때인 1990년 초 설암에 걸렸던 탓이다.
위원님을 근처 설렁탕집으로 모셨는데, 밥과 고기는 외면한 채 술만 계속 마셨다.
그 얼마 후 코리아헤럴드 경제부장으로 위원님과 함께 계셨던 정 아무개 선배와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만나 뵌 적이 있다.
2011년 1월 지리산으로 향하던 차안에서 나는 위원님의 부음을 들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갔었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위원님은 연세대 정외과 8회로,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동기다.
대전고를 나와 연세대 입학 시험을 치르면서 하나의 ’신화‘를 남겼다.
모든 답안을 영어로 써냈기 때문이다.







#김각위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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