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동의 추억, 그리고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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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의 추억, 그리고 인연

by stingo 2021. 8. 30.

예전 학교 다닐 적에 하숙집이 명륜동 성균관대 입구에 있었다.

하숙집 골목 들어가는 입구에 단아한 병원이 있었다. '이교웅 산부인과.'

한글학자인 一石 이희승(1896-1989) 선생의 아드님이 하는 병원으로,

동네에서는 친절하고 솜씨좋은 병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생전의 一石 이희승 선생 ​

 

내 방이 있던 하숙집 2층에서 내려다보면 그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초여름이면 발갛게 꽃을 피우던 사르비아가 피어있던 그 집 정원이 생각난다.

2014년 1월인가, 그 병원 원장님이 타계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 시절 그 동네 병원과 하숙집을 잠시 떠올려보기도 했다.

 

며칠 전 다시 명륜동 그 하숙집과 그 병원을 떠올리는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에 문화재위원장으로 선임된 고교동기 전영우 박사와 점심을 하러 동숭동 나간 길에서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가는 도중에 전 박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전 박사의 처가가 이희승 선생 집안이라는 것. 그리고 동숭동 일대가

일석선생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으로, 곧 전 박사 처가가 그 동네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던 중 어느 지점에서 마침 고개를 들어보니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희승 선생을 기리는 ‘일석기념관’이었다.

전 박사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다가 문득 명륜동 그 병원이 생각나 그 얘길했더니,

그 병원 원장이 일석선생의 아드님이 맞다는 것,

그리고 전 박사의 장모님이 일석선생의 따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 박사 부인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일석선생이었던 것이다.

참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자리는 그 얘기로 거의 채워졌고,

그 인연으로 전 박사가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동숭송 '일석기념관'

 

명륜동 그 하숙집 얘기도 좀 해야겠다.

명륜동 그 하숙집엔 군입대까지 한 2년 있었다. 무척 독특한 하숙집이었다.

주인아주머니부터 그랬다. ‘대한경신연합회 서울지부부회장.’ 하숙집 대문입구에 걸려있던 간판이다.

'경신(敬信)연합회'는 쉽게 말해 전통무속을 바탕으로 점을 치는 사람들의 모임체로

속칭 ‘점쟁이’단체인데, 주인아주머니가 그 단체의 부회장으로 영향력이 강했다.

영향력이 강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만큼 ‘신빨’이 잘 먹히는 점쟁이였음을 의미한다.

 

그 아주머니는 그 때 당시 50대 초반이었는데 미모가 돋보이는 분이었다.

우리 하숙생들은 한달에 두번은 아주 잘 먹는다.

주인 아주머니가 모시는 신들에게 매월 보름과 그믐날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이름이 인향(仁香)이었던 주인아주머니는 외국어실력도 뛰어났다. 그 집에는 미국 GI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기지촌 여인들과의 혼인과 관련해 점을 치러 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외국인이 올 경우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통역을 요청할 것으로 기대했다.

나와 같은 집에 있던 의과대학에 다니던 고교동기는 영어를 썩 잘했다. 하지만 그런 부탁은 한번도 없었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손님이 들러 아주머니의 일층 神堂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듣곤했는데,

그 아주머니는 영어에 막힘이 없었다. 영어 뿐 아니라 중국어, 일어, 러시아어도 능통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神堂에서 나를 조용히 부르는 것이다.

웬일인가고 내려갔더니 이런 부탁을 한다. 글을 부탁하는 것이다.

아주머니에게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6. 25 전쟁 때가 신혼이었는데, 남편이 자택 대문에서 인민군으로부터 즉결처분을 당했고, 그걸 목격한 아주머니는 그 길로 신병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바랬던 글은 절, 그러니까 사찰이름 하나를 작명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아놓은 돈으로 노년에 절을 하나 짓고 그 속에 묻히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름 신경을 기울여 사흘만에 작명을 하나 했다.

‘仁香寺.’ 아주머니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그걸 한지에 곱게 써 드렸더니 아주 만족해하셨다.

(이 부분에선 기억이 헷갈린다. 仁香寺로 지어준 것이 맞는 것 같은데,

또 하나 明香寺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아주머니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인데, 가끔 그 아주머니 생각이 나곤한다.

전 박사와 얽힌 명륜동 그 병원 얘기를 한 그 날에는 유독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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