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어가 산을 오르면서는 산 아래 일을 생각한다. 딴 생각인가, 바른 생각인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 중 하나는 세상의 시름을 잊기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아득바득 살아가는 세상사를 그나마 산을 오르며 시름을 달래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부득히 산 아래 일을 생각해야 하고 그의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 같은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산을 오르며 산 아래 일을 생각하는 것도 일견 타당하다할 것이다.
산 아래 일을 잊기 위해 산을 오른다고도 한다. 그러면 산에서는 산 생각만 하고 오를 일이다.
어느 게 맞는가를 따지는 것 자체부터가 좀 어불성설적이기는 하다.
어제, 불광동 장미공원에서 출발한 나의 북한산 산행은 모처럼 사모바위까지 이어졌다.
탕춘대 암문에서 친구들과 합류하기로 하는 기존의 약속을 깨고, 친구들에게는 나혼자 먼저 오르겠다며 홀로 올랐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친구들과의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이르게 약속지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혼자서 북한산에 안긴 '홀로 산행'이었다. 멀리 향로봉과 비봉능선을 바라보며 북한산을 생각하며 오른다.
향로봉에서 비봉능선으로 붙는 과정에서의 오금이 달달거리는 그 코스를 생각하면서 언뜻 그 쪽으로
붙어보려는 생각을 하다 아서라 했다.
그럴만한 체력도 이젠 아니고 무엇보다 파이팅 그 자체가 없는 터에 그 쪽으로 붙었다가
무슨 낭패를 당할지가 솔직히 두려웠다.
향로봉과 비봉과 사모바위의 옛 추억을 생각하며 오르는데,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산 아래 일이 생각을 파고든다.
우선 자, 오늘은 내려가서 무얼 먹고 무얼 마실까. 내가 묻고 내가 말하는 답은 뻔하다.
필시 '삼각산'을 갈 것이고, 거기서 제주도 흑돼지 아니면 두부찌게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것이다.
그러다 기분이 동하면 소주를 마시고.
오늘은 얼마나 마실까. 일주일 만의 술이니 좀 마실까, 아니면 이왕 맑아져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좀 자제할까.
친구들과는 무슨 얘기거리가 화제가 될까.
11월 초로 잡혀진 제주 한라산 등반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가 많을 것인데, 거기에 내 얘기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며칠 전 작은 애가 모처럼 쉬는 날, 혼자 아무런 장비없이 비오는 도봉산 망월사를 찾아 올랐다가
포대능선에서 죽을 뻔 했다는 얘기를 아내로부터 들었는데, 언제 애랑 망월사를 같이 올라야지.
아침 신문에 수월관음도에 관한 기사가 나온 걸 언듯 봤는데, 집 거실에 걸려있는 수월관음도을 한번 챙겨 봐야지 등등.
친구들과는 비봉능선에서 합류해 사모바위에서 요기를 한 후 하산.
하산 길부터는 짐작했던대로 한라산 산행 얘기가 나오고 결국은 '삼각산' 뒤풀이까지로 이어졌다.
계획을 맡은 친구가 요모조모 철저히 잘 짰다. 내가 이러고 저러고 할 말이 없다.
시켜놓은 막걸리도 제주도와 한라산 얘기로 시들해졌다.
막걸리 석 잔 마시고 한 마디 했으니 술김에 한 얘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나이 칠십 줄의 제주 여행과 한라산 산행 계획을 그렇게 꼼꼼하게 짤 필요가 있나.
그냥 가서 이리저리 부닥치는대로 하는 것도 재미아니겠는가.
이런 말 딱 한 마디했다가 친구들로부터 욕바가지를 들었다.
결국 산 위에서의 이런저런 생각들은 아모 쓸데가 없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 무참히 깨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산,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도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
(李泰俊의 '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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