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문득 시인의 체취가 그리워 꺼내 본 시인의 육필원고.
2008년 가을, 일산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내 손에 잡혀준 것이다.
우리는 그때 길거리 벤치에 앉아 마산 얘기를 많이 나눴다.
시인은 나의 고향인 마산과 이런저런 인연이 깊다.
1970년대 초중반,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 연금을 당한 곳이 마산의 결핵요양소다.
그 무렵 밤이면 요양소 담을 넘어 시내로 나오면 그 때 대학 1, 2학년이던 우리들과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
옛 얘기들을 꺼내 나누면서 추억에 젖으며 함께 많이 웃었다.
시인은 그 무렵 술이 취하면 '설악왕국'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설악왕국'의 마지막 왕손이라면서 그 증표를 꺼냈다. 깨어진 면경이었다.
우리 후배들은 그때 시인의 그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었다.
그런 얘기를 한 후 시인의 마무리는 노래였다. '백치 아다다.'
시인은 마산 얘기를 나누면서 한 후배 소식을 물었다. 나의 고교 1년 후배 하남근이다.
시인은 그 후배를 무척 아꼈다. '똥을 알자'는 취지의 ‘糞知會’ 결성을 함께 논의할 정도로 가까웠다.
후배는 내가 시인을 만나기 3년 전 빠리에서 세상을 떴다.
후배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녁답에 뭔가 답답한 마음에 부엌에 연한 창문을 열었더니,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후-욱하고 불어 닥쳤다.
문득 차가움이 느껴지는 생경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런 시인의 부고를 접했다.
슬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절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達摩 안에
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風蘭 곁에도
있다
맨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폿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 하며,
(김지하 - 절, 그 언저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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