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선배, H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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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사람)

고향 선배, H형

by stingo 2022. 10. 29.
대학 1학년, 청파동에서 하숙할 적에 나는 주간한국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그 하숙집의 말하자면 '수문장' 격이었다. 예쁜 숙대생이 많은 그 하숙집을 기웃거리는 SKY 학생들과 사관생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수문장' 역할을 한 것은 그 집에 남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 4학년 선배 한 분이 계셨는데, 여러모로 좀 문약했고, 내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고 팔팔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인가, 한 무리의 학생들이 철대문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어 나가 보았다. 대문 사이로 언뜻 보여지는 면면들이 안면이 있었다. 보니 고등학교 1년 선배들이었다. 선배들이었지만, 그렇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내 시선이 그렇게 고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용무를 물었더니, 누구 하나가 영문과 다니는 누구누구를 물으며 만나볼 수가 없느냐고 했다. 내가 후배라는 걸 알았으니 말이 그렇게 고분하지는 않았다. 미팅을 한 사이이고 하숙집을 알으켜주길래 찾아왔다는 것. 나도 용무적으로 대했다. 그 여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어서 일단 그 무리들을 집 안으로 들여 응접실에서 만나게 해주었다.
 
그렇게들 몇 번인가 더 찾아오곤 해서 나하고도 면이 익숙해졌고, 나로서는 뭔가 로맨스가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그 날 한 여학생을 만나러 온 선배가 아니라, 그 무리에 끼여 온 다른 한 선배가 일을 냈다. 약대 다니는 고향 여학생과 눈이 맞아 연을 키웠고, 훗날 결혼까지로 이어졌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도 그 선배들과 인연이 맺어져 친숙한 사이가 돼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선배들 중의 한 분이 연세대 상과를 다니던 H형으로, 그 날 그 무리의 여학생을 만나러 온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 몇 번 본 적도 있고 얘기도 적잖게 들었다. 힘이 그야말로 장사라 맞짱 뜰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했고, 공부도 잘 해 그야말로 문무를 갖춘, 그리고 두주불사의 선배였다. 내 처지로 보자면 나는 그 선배의 반의 반도 못 된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그 선배와 나는 잘 어울렸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이도 만났고 많이도 퍼 마셨다. 둘이 만나 마시면 제어가 안 된다고 해서 일정 기간 서로 만나지 말자는 '협정'까지를 만들 정도였다.
 
이 선배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호방스럽기 짝이 없다. 모 재벌그룹의 실질적인 회장 격인 부회장을 역임했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그런 티를 드러내질 않는 선배였다.
 
부장시절이었던가, 관세청 인근의 사무실로 부르길래 찾아갔더니, 사무실에서 악! 악!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싸움이 났나싶어 들어갔더니, 훌렁 벗어제친 난닝구 바람에 직원들 모아놓고 닭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십여명의 직원들을 상대로 1: 1 식으로 한 명씩 상대하고 있었는데, 직원들이 판판이 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얼마나 우스운 광경인가. 직원들이 지른 비명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부장의 그 우스꽝스러운 행태에 대한 일종의 과장적인 제스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선배의 차 트렁크에는 항상 위스키를 포함해 각종 술이 그득했다. 다른 술이 아니라 그룹계열사의 술이다. 어떤 술집엘 어떤 누구와 가도 마시는 술은 항상 트렁크의 그 술들이었다. 그 정도로 애사심이 강했다고 해야할까.
 
선배가 모교의 재경동창회 회장을 하면서 그 곁에서 홍보 일을 도우며 한 2년 함께 보낸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4, 5년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 고향 마산의 무학산 기슭에 집을 지어놓고 도사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짬짬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저께 모처럼 올라오셨다. 교대 역 인근 모 주점에서 반가운 해후를 했고 다른 선배, 친구들과 함께 잔을 기울였다. 어제 아침에 보니 누군가 보낸 이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찍은 사진이 지금껏 없어 그런지 사진이 좀 어색하고 생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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