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은사의 유고집을 최근에 어느 분으로부터 얻었다.
지금은 고인되신지 오래 된 정재관 선생님의 평론집인 <문학과 언어, 그리고 사상>이라는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선생님의 체취가 느껴진다.
무겁고 냉소적이었던 선생님. 그래서인지 우리들에게 상당히 엄격하셨다.
그래서 우리들 제자 사이에 선생님에 대한 달달한 추억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말들은 별로 나오질 않는다.
다만 실력은 뛰어나셔서 우리들 대부분이 따라가기에 버거워했던 기억은 있다.
우리 제자들 중에서도 공부를 잘 한 부류는 선생님에 대한 이런 저런 기억이 많을 것이지만,
나를 포함해 그렇지 못한 제자들은 그래서인지 딱히 선생님을 떠올릴 만한
어떤 키워드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다. 한 가지는 있다. 지독한 독설가였다는 것.
그것도 시니시시즘이 가미된 독설로,
듣는 우리들을 꼼짝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었던 선생님이셨다.
그런 선생님의 유고집이라 더욱 관심이 간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 문학평론집을 내가 읽고 소화해 낼 자신은 솔직히 없다.
읽기에 부담감이 앞선다는 얘기다.
이 책의 저자 소개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경력을 새삼스럽게 알게됐다.
보기에 선생님은 대기만성형이었던 것 같다. 서울대국문과를 나오셔서 당신의 모교인
마산고등학교로 부임해 가르치시고, 그 후 마산의 몇몇 대학 교수와 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다 52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신 그 역정이 결코 가볍지않아 보인다.
특히 1980년 8월 당시 신군부에 의해 교직과 논설위원직을 강제 박탈당했던 고초가
그러하고 결국 그에 따른 여파가 선생님의 명을 단축시켰을 개연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그러하다.
선생님은 마산고에 재직 중 전국적 규모의 ‘자유교양경시대회’에서
‘프로타코스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으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문학평론계에 두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어 1975년에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분에서
각각 당선해 중앙문단의 시선을 받았으며 이로인해 제 1회 마산시 문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4년 만에 교수직에 다시 복귀하지만 그 이듬해 세상을 뜬다.
그러니까 선생님 인생의 절정기는 1975년에서 십년 남짓한 기간이었던 셈이다.
나는 공부가 신통치 않은 말석의 제자였기에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그리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두어 번의 어떤 계기는 있었다.
1977년 마산에 잠시 머물면서 그곳 신문사 견습기자 시험을 쳤는데,
면접장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면접위원이셨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 선생님이 예의 그 냉소적인 독설로 나에게 물었다.
뭐할라꼬 요-까지 내리 와 신문기자가 될라카노. 그래 좋다. 합격되면 어디로 가고싶노?
선생님의 이런 물음에 나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문화부라고 대답했고,
그에 대해 선생님은 빈정거리는 독설로 면접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1971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학생으로서 재경학우회 문화행사를 마산에서 열고있을 때다.
어느 날 선생님이 논설위원으로 계신 그곳 신문에 칼럼형식으로
우리들 재경학생들의 이런 활동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선생님이 쓰셨던 것이다. 우리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하여 항의단을 구성했다.
당시 마산 중성동에 자택이 있었던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러갔다.
선생님 집 대문 앞에서 결국 나는 그 항의단에서 빠졌다.
고등학교 스승인데 어떻게 강력하게 항의하겠느냐며 항의단을
전부 서울과 부산의 고등학교 출신들로 바꾼 것이다.
나도 솔직하게 말해 그 당시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내가 어떤 조의 항의를 하든
나는 아마 몇 마디 말도 못 꺼내고 선생님의 독설에 쓰러졌을 게 분명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선생님 앞에 나서지 않게된 것을 무척이나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선생님의 이 평론집 <문학과 언어, 그리고 사상>은 2018년에 출간된 것으로 나온다.
그 한 해 전에 마산에서 뜻있는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정재관 선생 문집 간행위원회>가 결성됐고,
1년 여의 준비과정을 통해 이 평론집이 나온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이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인데,
막상 선생님의 이 유고평론집을 대하고 보니 죄송함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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